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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년 살고 처음 생긴 감정...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기사승인 2019.09.01  15:4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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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릴레이 인터뷰] '제2의 황금기'를 맞은 천해수님

혈우병으로 '힘든 경험'을 해 본 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본 바 있다.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하고, 통증이 일상화되어 이제 웬만한 통증에는 얼굴도 찡그리지 않는다 했다. 그런데 그런 힘든 경험담 중 가장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쉽게 그 고통이 가늠되지 않는 경험은, 거동이 어려워 방 안에서 먹고 자며 홀로 몇 년을 지냈다는 분들의 이야기이다. 그 암흑의 시간을 빠져나오는 데에는 각자의 계기들이 있었는데, 그 첫 조력자가 꼭 '발달된 주사약' 만이 아닌 것은 그러한 상황을 벗어나는 데에 본인의 의지와 주변 사람들이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듯 하다.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 천해수님은 어떤 힘으로 어둠을 헤쳐 나왔고 지난해까지의 좌절을 극복해 지금 '제2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는지 직접 들어보자.

(시즌3 현재 릴레이 순서) 김은기 위원장 – 조수호, 조진원 형제 – 황정식님 - 조진기님 - 이명림님 - 이귀병님 - 전수지 간호사 - 이승민님 - 이남일 간사 - 지현승님 - 조달호님 - 김종필님 - 김수섭 아버님 - 김선경 복지사 - 김진규님 - 김연수님 - 장영진님 - 이강안님 - 김대봉님 - 이상훈님 - 정재민님 - 김근우님 - 박정서 회장 - 알렌 웨일 총재 - 김민지님 – 박상진님 – 우종완님 - 천해수님

Q. 소개말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문경에 살고 있는 천해수라고 합니다. 

   
▲ 문경시청 옆 커피숍에서 밝은 표정으로 만난 천해수님

Q. 시골 사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여긴 시청 바로 옆이네요. 이사하셨어요?

네. 시골에 어머니랑 둘이 살았는데 치매가 찾아오고 하시다보니까 자꾸 다치시고 저도 잘 보살펴드리기가 어려워서 요양원에 모시고 그 큰 집이 필요 없어서 여기로 옮겼어요. 작아서 혼자 살기에는 딱 맞고 편리한데 아파트다 보니 층간소음이 좀 있어서 시골이 나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Q. 다리 때문에 힘든 시기 보내셨다고 들었는데요...

2008년에 고관절 수술을 하고, 2009년에 왼쪽 무릎, 2010년에 오른쪽 무릎 인공관절을 했어요. 그런데 2014년에 오른쪽 무릎(인공관절)에 염증이 생겨서 3개월 사이에 다섯 번을 수술대에 올라갔지 뭐에요. 염증 긁어내고. 인공 들어내고, 시멘트 채워넣고. 다시 인공 넣고. 출혈 안 잡혀서 또 하고...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 작년에 왼쪽 무릎도 같은 염증 증상이 왔는데 병원에서도 지난번처럼 고생할까봐 겁이 나니까 수술을 안 해주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앉은뱅이가 돼도 좋으니까 수술만이라도 해달라'고 해서 받을 수 있었어요. 일반인 염증수치가 0.4~0.5라는데 제가 당시에 3.2까지 올라가니까 며칠간 항생제를 들이붓다시피 해서 2.5까지 떨어뜨리고 수술에 들어갔죠. 열어보니까 오른쪽처럼 다 주저앉아서 똑같이 재수술하고 허벅지 뼈도 좀 부서져서 철사로 감고 작년 12월에 퇴원해 집에 온 거예요. 

   
▲ 김태일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천수해님...너무 진지해요.ㅎㅎ

Q. 인공관절 수술 후에 염증이 심한 이유는 뭐라고 하던가요?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도 뉴스에 나왔던 그 문제의 고관절(존슨앤존슨 자회사의 인공 고관절) 때문 아닐까 생각은 해요. 정작 고관절은 괜찮은데 그 이후에 한 양쪽 무릎이 다 주저앉은 거잖아요. 거기서 안 좋은 성분이 많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의료진은 그거에 대해서 별말씀은 안하시던데, 그 시기에 수술했던 다른 우리 환자들도 몇 명 저처럼 염증 때문에 고생한 걸 보면 무슨 문제가 있어도 있었던 것 같아요.

Q. 지금은 어떻게 관리하세요?

예전엔 아플 때만 주사를 맞았었는데 마지막 수술 후로 예방요법을 하니까 몸이 훨씬 좋아진 것 같아요. 혈관이 안 좋아서 2009년부터 팔에 카테터를 심었어요. 3일에 한 번씩 소독하고 8개월에 한 번씩 교체해야 해요. 강동경희대 박영실 교수님 통해서. 부분마취하고 이것도 일종의 수술인데 라인이 거의 50cm 정도 몸속으로 들어가니까 기분도 안 좋고 힘들죠. 초창기에는 보험도 안 돼서 50만원돈 들었는데 한 4년 전부터는 보험이 돼서 한 번 교체할 때마다 8만원 정도 들어요. 

카테터에 주사할 때마다 막히지 않게 마지막엔 항상 헤파린을 1000:1로 묽게 섞어서 넣어주는데, 잘 몰랐을 때 어쩌다 헤파린이 많이 들어가니까 머리가 어지럽고 부작용이 있더라고요. 지금은 손에 익어서 이틀에 한 번씩 그린진 1,000단위 예방요법 잘 하고 있어요. 

재단이 고마운 게, 제가 병원까지 약 타러 가기가 어려우니까 한 달에 한 번 방문진료 와서 약도 처방해주고, 우종완씨는 여기 보건소장하고 만나 제 사정 얘기해서 거즈랑, 코튼볼이랑, 종이테이프 같은 카테터 소독용품을 무상으로 줄 수 있게 해줬어요. 떨어질 때쯤 되면 보건소에서 전화해선 집까지 갖다 줘요. 

   
▲ 팔에 심어 심장의 우심방까지 연결되는 카테터(중심정맥관)

Q. 우종완님이 천해수님을 릴레이로 추천한 인연이 그런 거였군요.

처음 수술하기 전에 한 5년 동안 컴컴한 방 안에서 폐인처럼 살았어요. 혈우병에 대해서도, 약이 있는 줄도 모르고 침대랑 화장실만 오가는 감옥 같은 생활 했는데 우종완씨랑 대구에 김영자씨(재단 상담사)가 찾아와서 저를 설득하고 약 맞게 하고 수술까지 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분들이에요. 처음에는 제가 오지 말라고 욕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면 부모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신설동 재단 처음 생겼을 때 한 번 가서 약을 맞았는데 그걸로 치료가 다 끝난 줄 알았어요. 90년대 초반이었는데 그때 가니까 지금 물리치료사로 계시는 권선생님이 군대 막 제대해서 와 있더라구요. (웃음) 지역 후배거든요. 그래서 저는 주사 맞았으니까 혈우병 다 나은 줄 알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회생활을 많이 했죠. 노가다도 뛰고 보험 일도 오래 하면서 몸이 많이 망가졌었죠. 그렇게 지워버리고 싶은 몇 년을 보내고 수술 이후에 예방도 하고 하면서 이제 50을 넘겼지만 제2의 황금기를 맞고 있는 것 같네요.

Q. 예전에 시도 많이 쓰셨잖아요?

지금도 계속 하고 있어요. 요새는 시 써놨던 걸 인터넷에서 좋은 그림 찾아서 시화로 옮기고 컴퓨터에 저장해놓고 있습니다. 그냥 취미고, 나중에 혹시라도 나이 먹어서 이곳에 없을 때는 나 라는 사람이 세상에 왔다 갔다고, 점 하나라도 찍고 간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웃음) 제가 예전부터 혼자 있고 아프던 시간이 많다보니까 그때 느꼈던 외로움이나 고통을 글로 표현하고 달래고 하기 위해서 썼던 게 시가 된 것 같아요. 많이 위로가 됐고, 이제 밝은 빛으로 나왔는데 다시 그 암흑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더라구요. 먹고 싶은 거 먹고 가고 싶은 곳 가고, 결혼까지는 아니어도 여자친구도 만나고 있고 행복해요. 시는 나중에 여러 편 모이면 인쇄소에서 묶어서 딱 한두 권으로만 남기고 싶어요.

일은 문경시 지체장애인협회 모전동 분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지역 장애인들 돕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걷는 것도 많이 좋아져서 새벽 4시 반만 되면 일어나서 찬물샤워하고 산책을 2킬로 3킬로 해요. 작년까지는 무릎 때문에, 어머니 때문에 신경 쓰는 게 많아서 정신적으로 힘들었는데 지금은 마음도 편하고 좋아요. 문경시에서 장애인 가정에 가사도우미도 보내줘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3시간씩 집안일도 도움받고 있네요. 예전엔 그런 혜택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협회 일을 하다보니까 그런 제도를 활용할 수 있게 되더라구요.

   
▲ 천해수님이 써 모으고 있는 시화 작품 중

Q. 가장 괜찮은 장애정책들은 또 어떤게 있을까요?

문경시 협회에서는 여성 장애인들 위한 자활사업이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고요, 현 회장님이... 진짜 그분은 얼마 안 되는 급여 다 후원금으로 내놓고 사비 털어가면서 활동하고 계셔서 존경받고 있어요. 장애인 일자리도 많이 만들고, 여기 구청 주차관리만 하더라도 밤낮 교대로 장애인 열여섯 명이 새로 직업을 갖게 됐으니 훌륭하죠. 이런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사업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Q. 혈우병이 있어서 혹시 좋은 점도 있으셨나요?

글쎄요... 항상 아팠던 기억만 있어서... 굳이 좋은 점을 따지자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잖아요. 캠프에서, 수술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다들 같은 아픔을 갖고 있고 그러다보니 마음도 맞고 나와는 다른 세계를 많이 알려줬죠. 정보도 얻고요. 예전에 일 할 때에는 대부분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여긴 그런 게 없잖아요. 특히 청림이라는 친구는 제 조카보다도 어려서 한 스무 살 차이 나는데 같은 아파트에 살았어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친구처럼 지냈어요. 지금은 대전으로 이사갔지만 수시로 연락하고 있어요.

Q. 문경 자랑 좀 해주세요.

관광지가 많죠. 문경새재 있고 선유동계곡... 탤런트 전인화씨 외할머니가 그쪽에 살아서 많이 왔었어요. 그리고 농암에 쌍용계곡도 좋고, 점촌쪽으로는 진남교, 고모산성 뭐 볼 게 너무 많아요. 고모산성은 임진왜란 때 거길 지나야만 서울로 갈 수 있는 길목이라 접전지였다고 해요. 옛날엔 칼 든 산적도 많이 나와서 혼자선 건너지도 못하는 길이었어요. 문경새재가 큰 길 뚫리기 전에는 눈 올 때 차가 굽이길을 못 내려가서 휴게소에서 자고 내려오고 그랬잖아요. 지금은 태조왕건 촬영지도 있고 전기차를 운행해서 장애인들도 관광하기가 좋아요. 

   
▲ 올해 여름캠프에서 수술동기 절친 노태길님과 나란히 앉았다.

Q. 혈우사회에 더 개선되었으면 하는 부분은?

우리 모든 사회가 마찬가지겠지만 혈우사회에도 감투 하나 썼다고 사람이 달라지고 어깨에 힘 들어가는 게 있는 것 같아요.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젊은 사람들 앞길 막고 콩 놔라 팥 놔라 하는 건 빨리 사라져야 할 관행 같아요.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보고, 잘못되면 좀 나서서 바로잡더라도 젊은 사람들한테 맡겨 놓는 게 우리 취지에도 맞는 거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아프지만, 우물 안 개구리가 돼선 안 되죠. 한 발만 밖으로 톡 튀어 나가면 다른 큰 세상이 있는데 나가면 죽는 줄 알고 맨날 고 안에서 아웅다웅하고 있으면 발전이 없어요.

Q. 꿈이 무엇인가요?

지금 이 선에서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잘 사는 거예요. 제가 어디 가서 벼락부자 되는 꿈이 있겠어요? (웃음) 다만 한가지 최근에 욕심이 하나 생긴 건,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하고 잘 지내고 싶어요. 젊었을 때에도 사랑을 몰랐는데 반백년을 살고 나니까 그런 감정이 자리잡는다는 게 저도 신기해요. 여자친구도 그렇고,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 이 사람들하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제가 그렇게 막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2, 30대 때 한참 돈 벌 때에는 그 한 푼 벌려다가 몸 망가지고 모든 걸 잃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40대에는 세상을 많이 부정적으로 봤고, 지금은 많은 게 정리돼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 어디가서든 당당하구요. 여행 가기 위해서 적은 수입이지만 적금도 붓고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 썼던 거랑 앞으로 쓸 거 USB에 잘 담아서 간직하는 게 작은 꿈입니다. (웃음)

Q. 다음 릴레이주자를 추천해주세요.

아까도 얘기했던 친한 후배 신청림을 했으면 해요. 청림이가 중국에서 왔지만 한국에 적응하려고 스스로 노력 많이 했어요. 서로 조언을 많이 하는데, 저는 저 같은 길 밟지 말라고, 세상이 다 내 것 같아도 항상 몸 조심하고 주변 돌보면서 살라고 얘기해주고 있어요. 지금은 대전에서 동사무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고 여자친구도 사귀면서 자리 잡아가고 있어요. 대견하죠~

Q. 장애를 가진 환우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한마디

당부드리고 싶은 건, 저 같이는 살지 말라 이거죠. 젊었을 때 젊음을 낭비하지 말고 젊었을 때 조금 더 자기를 돌아보고 노력하면 저 같이는 안 살 것 같아요. 저도 한때는 많은 아픔을 겪고 방황을 많이 했는데 그런 삶은 지금 와서 보니까 다 부질없는 것이고 잘 못 산 것 같더라고요. 저는 그 반면에 지금은 행복하고 제가 살아오면서 지금이 최고 황금기인 것 같아요. 몸은 불편해도 마음은 부자고 항상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니까 여러분들도 항상 희망 잃지 말고 자신감 가지고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병에 대해서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사시면 그게 하나의 행복이고, 제가 봤을 땐 여러분이 용기 잃지 말고 희망 가지고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황정식 기자와 헤어지기 전에

'주사 한 번 맞고 혈우병 다 나은 줄 알았다'는 말에, 예전 정보가 없던 시절의 문제라고 치부만 할 게 아니라 현재는 혈우사회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나 하는 돌아봄을 가져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늦지 않게' 찾아온 사랑으로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 천해수님께 응원과 감사의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헤모라이프 김태일 황정식 기자 / 우리코헴과 컨텐츠 콜라보]

김태일 기자 saltdoll@newsfinder.co.kr

<저작권자 © 헤모필리아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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