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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우병 환우 인공관절수술 신중, 또 신중해야"

기사승인 2018.06.26  05: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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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릴레이인터뷰] 환우 최초 정형외과의사 이상훈 원장

한국의 등록된 혈우병 환우는 2300여 명이다. 그 환우의 가족들과 의료진, 환우협회와 보건당국, 복지단체와 제약산업 관계자까지 포괄하여 '혈우 사회'라 부르는 건 이제 낯선 일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고, 내밀한 부분까지 터놓고 이야기 할 공간도 많은 것은 아니다. 본 '릴레이인터뷰'를 통해 한 번 서로의 맨얼굴을 바라보고 이야깃거리를 털어보자. '너와 나의 연결 고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시즌3 현재 릴레이 순서) 김은기 위원장 – 조수호, 조진원 형제 – 황정식님 - 조진기님 - 이명림님 - 이귀병님 - 전수지 간호사 - 이승민님 - 이남일 간사 - 지현승님 - 조달호님 - 김종필님 - 김수섭 아버님 - 김선경 복지사님 - 김진규님 - 김연수님 - 장영진님 - 이강안님 - 김대봉님 - 이상훈님

코헴회 김대봉 전 회장의 추천을 받아 이상훈 원장께 마이크를 넘겼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이상훈 원장은 중증 혈우환우이면서 세계 최초로 정형외과 의사가 된 의지의 혈우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장’이라는 호칭 부담스럽다며 그냥 같은 환우로 대해 달라는 이 원장을 2018 WFH 총회가 열리던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학술대회장 SEC에서 만나, 어렵게 의사의 길을 걷게 된 이야기부터 환우들에게 도움 될 만한 정형외과적 조언들까지 야무지게 들어보있다. 


1. 본인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상훈이라고 합니다. 저는 8인자 혈우병 환자이고 정형외과 의사이고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고요. 경희대 병원에서 인턴하고 정형외과 레지던트까지 하고 대학에서 임상교수로 근무하면서 혈우병 연구를 한 다음에 현재는 정형외과 전문병원에서 원장으로 있어요. 주로 인공관절과 관절내시경 위주로 하고 있고요. 무릎관절과 고관절 인공관절이 제 전공이에요.

   
▲ WFH 총회 현장에서 릴레이인터뷰에 와준 이상훈 원장

2. 하시는 일을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정형외과 의사니까 수술을 주로 많이 하고요. 제가 인공관절을 2000건 정도 했어요. 무릎 인공관절수술로 2000건 정도 했고 관절내시경은 2500~3000건 정도 한 것 같습니다. 의사 경력 7년 정도 되는데 하루에 인공관절 수술을 10건 정도 하고 관절내시경 수술은 많이 할 때는 15건 정도, 하루 수술을 20건 정도 하면서 주로 수술을 하는 외과의사죠. 진료도 보고 또 경남이나 지역 혈우병 세미나, 학회 같은 것 있으면 참석해서 강의도 하고 주로 그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혈우환자 수술은 못하고 있어요. 왜냐면 혈우환자 수술을 함에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약이기 때문에 제가 근무하는 곳은 개인병원인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전문병원이긴 해도 저도 거기서 근무하는 월급 의사 이다보니 혈우병 약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혈우병 약이 워낙 삭감도 많고 삭감이 되게 되면 병원에 타격이 크거든요. 그런데 경남지역에도 혈우환자가 적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많은 환자분들이 오시고 계십니다. 사실 녹십자와 초기에 얘기를 한 적은 있어요. “약을 들여 올 수가 있나하고” 혈우환자 수술을 한 번 해보려고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시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건 불가능했고 그래서 혈우환자들이 왔을 내과적인 약 처방은 하지 못하고 간단한 x-ray찍고 혈우재단 정형외과 협진과 비슷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일단은 하고 있어요. 대학병원에서는 혈우 수술까지 했지만 나와서는 못하는 게 안타깝죠. 중요한건 혈우환자 수술하기가 어려워요. 왜냐면 만성적이고 관절도 많이 망가져 있고 케이스 자체가 쉽지가 않아요. 비유하자면, 덤프트럭 같은 어려운 차 운전을 잘하려면 소형차 운전부터 잘해야 하잖아요. 제가 일반적인 수술 케이스를 많이 늘려서 조금 더 경험을 쌓고 나이 먹은 후에 혈우병 환자 수술을 해도 늦지는 않다고 봐요.


3. 혈우병성관절증과 흔히 알고 있는 노인분들 퇴행성관절염이 많이 다른가요? 

완전히 달라요. 저도 처음엔 비슷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무릎에는 뼈가 있고 관절을 싸고 있는 연골이 있고 연골판이라고 하는 물렁뼈가 있어요. 두 가지가 충격 흡수를 하면서 안 아프게 하는데 두 개는 신경세포가 없어요. 안 아파요. 찢어져도 안 아프고 어느 일정 연골이 닳아도 안 아파요. 근데 이게(연골) 많이 닳아지면 뼈가 노출이 되요. 그때부터 뼈에 골막이라고 하는 신경세포가 있거든요. 그게 노출이 되면 아프기 시작하는 거에요. 퇴행성관절염은 쓰다가 쓰다가 연골이 다 찢어지고 뼈가 노출이 되면서 아프거든요. 그런데 혈우병성관절염은 출혈이 되면 연골을 다 녹여 버려요. 퇴행성관절염은 콘택트렌즈처럼 마찰이 되는 부분이 조금이 마찰이 되면서 닳아 없어지는데 혈우병 환자들은 연골과 연골판, 관절을 이루는 조직들이 전체적으로 망가지니까 당연히 수술도 어렵겠죠? 관절 안에 피 찌꺼기도 많고요. 

조금 뒤집어서 얘기를 해보면 인공관절은 제일 마지막에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젊은 환자 중에 보면 인공관절을 너무 일찍 두 무릎, 두 고관절을 한 친구들을 봤는데 안타까운 게 젊어서 인공관절을 하면 나이 들어 또 해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술 전 무릎의 구부리고 펴는 각도가 잘 않나오는 상태에서 인공관절을 해도 각도가 크게 좋아지거나 그러지 않아요. 인공관절을 해도 뼈와 연골만 바뀔 뿐이지 무릎 주변에 있는 인대나 신경이나 전체적인 구조물은 바뀌지 않아요. 당장에 관절은 안 아플 수 있지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구조물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큰 변화가 없어요. 삶의 질이 좋아지긴 하지만 원래 가지고 있던 문제를 유발하는 구조적인 건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거죠. 인공관절이라는 게 많이 좋아져야 제 생각에는 50% 만족도를 준다고 생각돼요.

인공관절을 해서 좋아지는 한 가지는 통증이죠. 본인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려있지만 걸을 때 불편감이나 구부렸다 폈다 하는 각도는 기대만큼 안 나와요. 수술만 하면 다 해결될 거란 생각은 환상이죠. 인공관절을 할 거면 최대한 늦춰서 하는 게 좋죠. 요즘 먹는 진통제들이 좋은 게 많이 나왔거든요. 약을 먹으면 일반적인 생활에서 통증 없이 지낼 수 있는 경우도 많이 있어요. 출혈이 되지 않게 노력하고 근력강화운동도 하면서 최대한 내 무릎을 쓰고, 정말 버티기 어려울 때 가서 인공관절을 해야죠. 혈우병 아닌 환자들은 인공관절 수명이 25년 정도 되는데 혈우환자들은 논문에 나와 있기로는 잘 쓰면 15년 못쓰면 10년이에요. 이유는 출혈 때문인데, 인공관절을 해도 근육이나 주변 조직들은 그냥 있다고 했잖아요. 거기서 출혈이 생긴단 말이에요. 인공관절이라는 게 뼈에다 금속을 입혀놓은 것인데 금속을 입혀 놓은 사이에 피가 스며들면 뼈의 접합부위를 녹여요. 고정된 게 흔들거리고 엄청 아프죠. 

혈우병 인공관절 수술 경험이 많은 의사가 해야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의사들은 그냥 건강한 사람들 인공관절 하는 것처럼 ‘어 그냥 무릎에 대한 인공관절만 하면 되겠지’ 생각하는데 결과가 안 좋은 거에요. 그리고 수술시에 염증도 더 잘 생기니까 항생제도 더 써야 되거든요. 인공관절을 할 때 유명철 원장님, 조윤제 교수님, 김강일 교수님 같은 분들 수술하는 걸 보고 있으면 관절 주변 근육이나 인대를 같이 늘려주시거든요. 잘 움직일 수 있게 2차적인 수술에 필요한 경험이죠. 그래서 우리 환자분들은 꼭 혈우병 경험이 많은 의사한테 받아야 됩니다.

   
▲ 이 원장은 시종 명쾌하게 혈우환우의 관절관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4. 정형외과가 3D 직종로 분류되던데, 선택하신 이유라도?

정형외과 의사들은 속된말로 무식하다는 말을 해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루에 한 두 시간 자요. 트레이닝 과정에 한 두 시간 자고는 수술 방에 들어가야 되고, 소아과 내과 의사선생님들도 고생 많이 하시지만 그분들은 서서 일하지는 않거든요. 저희는 하루종일 서서 수술도 해야하고 소독도 해야 되고 앉아서 진료를 보는 일은 거의 없고 다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실 혈우환자가 의대 가서 의사가 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아요. 이강안 원장님 같은 경우에도 인턴을 할 때 약이 없어서 인턴도 제대로 못하시고 맨날 일 좀 하다보면 무릎이 붓고 그래서 인턴당직실에 앉아계시고 그런 어려움이 많으셨다는 애기를 들었거든요. 지금은 약이 좋아졌기 때문에 3D업종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도전해 볼만은 해요. 

제가 정형외과의사를 선택한 이유는, 어릴 때 병원에 가면 자꾸 아파서 주사를 맞는데 완치되는 약은 없고 ‘주사를 평생 맞아야 되나’ 그런 생각을 사춘기 때도 많이 했는데 물어보면 명쾌하게 답을 주는 의사는 없었어요. 그냥 약만 줄 뿐이지 어떤 병이고 어떻게 생활을 해야 하고 이런 연구가 많이 부족한 거죠. 그런데 정형외과 의사는 자연출혈 때문에 고통스럽고 잘 못 걷고 그런 환자들에게 인공관절이나 관절내시경을 해서 다시 걸을 수 있게 하는, 뭔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줄 수 있는 분야잖아요. 그래서 정형외과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힘들고 그걸 선택하기에는 희생이 많이 따라야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지금도 제가 정형외과를 한 겻에 대해서는 후회를 안 합니다. 세계 혈우병학회에 다녀보면 내과나 혈액학, 소아과 의사 중에 혈우환자인 사람은 몇 명 봤지만 정형외과 의사는 저 밖에 없어요. 그게 저 개인적인 영광일 수도 있지만 환자사회에도 굉장히 임팩트를 줄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제가 나중에 무릎이 망가져서 나이가 들어서 수술을 못할지언정 제가 젊었을 때 수술했던 경험이나 정형외과 지식들이 혈우병 사회에 줄 수 있는 영향력이 없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보람이 더 크다고 저는 생각해요. 


5. 의대와 레지던트 시절 이야기 좀 해주세요.

인턴 때는 별로 어려움은 없었어요. 예를 들면 침대 끌고 피 뽑고 그런 일들을 하는 거여서 크게 어렵지 않고 재미있었어요. 각 과를 다 도니까 산부인과도 하고 소아과도 하고... 레지던트를 하기 위해 처음 정형외과를 선택했을 때는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당연히 그랬겠죠. 경희대에 계시는 선생님들은 제가 혈우병 환자라는 걸 다 아셨거든요. 물론 면접에서 이런 얘기는 했었어요. “혈우병 환자 중에 다른 과는 있지만 혈우환자 수술을 하는 게 더 의미있다고 생각해서 정형외과에 지원했습니다”라고요. 교수님들 첫 번째 나온 질문이 뭐였냐면 “이선생, 내과나 소아과 해도 충분해” “그런 걸 해도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어” “힘드니까 하지마” 그래서 떨어졌었어요. 물론 성적 때문에도 떨어졌을 수 있지만요. 레지던트에서 떨어지면 병원에서 할 게 별로 없고 일반의가 되거든요. 일반의가 돼서 1년 동안 월급쟁이 생활을 하고 그러다가 다시 고민을 했죠. 이쯤에서 내과, 소아과를 해야 되나? 아니면 다시 도전을 해봐야 되나? 그때 유명철 선생님께서 다시 지원을 할 수 있게 심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결심하고 두 번째 지원을 하니까 교수님들이 “쟤 또 왔네 또 왔어”(웃음) 그런데 레지던트 되기 위해선 면접 말고도 시험을 보는데 제가 이를 악물고 레지던트 시험을 잘 봤어요. 결국엔 교수님들이 저에게 기회를 주셨고 합격하게 됐습니다.

레지던트 1년차에 굉장히 힘든 파트에 배정을 받아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나중에 생각을 해보면 저를 빨리 포기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닌가 싶기도 했죠. 잠을 거의 못잤고 또 저희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안 되거든요. 무조건 계단으로 다녀야 되고 하루 종일 서있어야 되고 팩터를 맞을 시간이 없어요. 또 동기들 있는 데서 자가주사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어요.  선입견이 생겨 버리거든요. ‘것 봐. 맨날 주사 맞아야 되고 환자가 무슨 레지던트를 한다고...’ 그냥 화장실에서 숨어서 주사 맞았어요. 그렇게 레지던트 수련을 하는데 2달째 되니까 그만두고 싶더라고요. 못하겠더라고요. 다리는 팅팅 붓고 쩔룩거리고 회진을 도는데 제가 너무 못 걸으니까 교수님이 한숨을 쉬시더라고요. ‘괜히 뽑았나... 수련 마칠 수나 있겠나’ 하는 그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와이프한테 전화를 했죠. “여보, 하고 싶었는데 그만둬야 될 것 같다”고, 우리 와이프가 “그만두라고 다른 거 해도 되니까” 하더라구요. 그날도 평소와 다르지 않게 회진을 도는데, 정형외과에서는 회진을 엄청 빨리 돌거든요. 미리 가서 문도 열어야 되고 잘못하면 혼나고 조인트도 까이고 ... 그런데 제가 못 따라가니까 교수님이 인턴하고 회진을 도는 거에요. 교수님이 저를 보곤 한숨을 쉬면서 버리고 가니까 너무 비참한 거죠. 그래서 죽을 때 죽더라도 팩터를 더 자주 맞고 꼭해야 일들만 하면서 몸관리를 먼저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시간을 내서 얼음찜질도 하고 잠도 자고 그렇게 해서 버티니까 2년차, 3년차 올라가면 일이 조금 편해지더라구요. 레지던트 3년차, 4년차가 되면 교수님들도 이 친구는 내 친구라는 생각이 있으셔서 ”이선생 아픈데는 없어? 빨리 팩터 맞고 와“ 하는 식으로 챙겨주셨고요. 그렇게 아슬아슬 레지던트 생활을 잘 마쳤죠.

레지던트 때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하루는 한 환자에게 소독을 해주는데 환자가 교수님한테 컴플레인을 한 거에요. “의사면 다냐, 소독을 두 번 해야지 한 번 밖에 안 해주고 지랄이냐” 난리가 났어요. 교수님이 크게 질책하진 않으셨지만 제가 가서 허리 숙여 사과를 했죠. “제가 잘 못 챙겨 드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했는데 “됐으니까 빨리 소독이나 하고 가라”고... 그래놓고 나중에 이분이 저를 찾아 오셨어요. 미안하다고요. 속으로 ‘이사람 왜 이러지?’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제가 소독카트를 미는 걸 보신 거에요. 절뚝거리니까 간호사들한테 물어봤대요. “저선생 소아마비냐”고. 간호사들이 개인정보를 다 얘기했더라구요.(웃음) “혈우병 환자에요” 하니 이분이 깜짝 놀란 거에요. 친척 중에 혈우병 환자가 있었더라구요. 그래서 저한테 오셔서 울면서 미안하다고, 제 손을 잡고 자기가 인생의 전환점을 찾았대요.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안팎의 사정을 모르고 그냥 불평을 하면 안 되겠다는 걸 저를 통해서 배웠다고... 자기 사촌도 혈우병 환자인데 그런 어려움이 있는데도 정형외과를 하고 굉장히 존경한다고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나중에 그 사촌분도 저한테 찾아오셨고요. 그런 일들이 생기다 보면 저 스스로도 많이 겸손해 지는 것 같아요. 레지던트 때 얘기 다 하자면 밤새요. 하하하

   
▲ 힘들었던 레지던트 시절을 떠올리며..

6. 아, 인터뷰하는 여기는 어디인가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라는 곳인데 세계혈우연맹 학회가 열리고 있는 곳이죠. 제가 알기로는 원래 글래스고라는 곳이 산업혁명 시기에 조선이나 유통, 섬유 그런 것들을 유럽 전역에 연결하는 곳이어서 굉장히 번영하고 부자들이 많았대요. 그런데 망했죠. 그러면서 글래스고를 다시 재건하기 위해서 학회나 이런 것들을 런던보다 이쪽으로 많이 유치한대요. 저도 처음엔 왜 런던이 아니고 글래스고지? 주변에 인프라는 잘 되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촌이잖아요. 비행기도 한 번 더 타야되고요. 불편하다는 생각도 했는데 와서 그런 얘기를 들어 보니까 이해가 되더라구요.


7. 이번에 포스터 발표가 있으신가요?

정형외과 질환에 관련돼서 포스터를 하나 게재하게 됐어요. 솔직히 대학에 있으면 논문이나 자료발표 많이 하는데 나와서 실질적인 수술을 하고 환자 보는 일들을 많이 하다보니까 특히나 지금은 혈우환자를 직접 수술하지 않고 있잖아요. 그런 부분이 쉽지 않아 주로 유명철 선생님이나 아님 경희대 선생님들 논문에 같이 참여해서 정리를 한다든지 공동저자 역할을 많이 하고 있어요.

   
▲ 작년 5월 서울에서 열린 WFH 근골격계 총회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는 이상훈 원장

8. 가족과 함께 오신거죠?

네. 제가 참석하는 비용은 학회에서 지원이 되지만 가족들이 같이 오면 그 비용은 제가 다 내야 되거든요. 사실 비용이 만만치 않아요. 또 가족이 오면 학회에 참석하는 게 쉽지도 않고 신경도 많이 써야하고 그래서 혼자 많이 왔는데 제가 아들이 둘인데 아들이 크니까 “아빠 다리가 왜 아파? 아빠가 주사를 왜 맞지?” 그런 얘기 많이 하거든요. 설명을 해도 잘 못 알아듣는데 이런 곳에 와서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강의하는 거 애들한테 보여줬더니 ‘아 저렇게 아픈 사람도 있구나, 꼭 아빠가 아니더라도 전 세계에 다 있구나’ 하고 이해하는 것 같더라고요. 2년 전 미국에 이어서 두 번째로 데려왔는데 교육적으로 봤을 때 괜찮은 것 같아요. 불만 중에 하나는, 오프닝 세레머니나 환송만찬 같은 때 가족들이 그냥 들어갈 수 있으면 좋은데 비싼 등록비 내지 않으면 못 들어가더라고요. 환자나 가족들이 좀 더 편하게 즐길 수 있고 많이 교류할 수 있으면 좋지 싶은데 좀 아쉬운 거 같아요. 또 재단이든 코헴이든 비용이 지출되는 거면 젊은 혈우 친구들이 세계 학회에 와서 한 명이라도 더 보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도 올 때마다 고사해요. 일주일씩 시간을 빼는 게 쉽지 않고 병원에서도 해야 되는 일들이 많아서 눈치가 보이기도 하죠. 앞으로는 저 같은 사람 말고 새롭게 대학생이 되거나 혈우병에 대해서 꿈이 많은 친구들이 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합니다. 저는 자비 부담으로 올 의향도 있으니까 그랬으면 좋겠어요.


9. 릴레이를 넘긴 김대봉 전 회장님과의 연결고리는 무엇인가요?

전에 김대봉 선생님하고 학회에 가서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얘기를 해보니까 본인이 가지고 계신 꿈이 많았고 하고 싶은 것들도 많으셨는데 혈우병이라는 것 때문에 좌절도 많이 하신 것 같았어요. 근데 저나 이강안 선생님...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의료업종에서 자기의 꿈의 펼치는 사람을 보고 좋아보이셨던 것 같아요. 주제 넘지만 제 얘기를 많이 듣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를 추천하지 않으셨을까? 저는 굉장히 영광으로 생각해요. 왜냐면 코헴지가 혈우사회인들이 다 보는 책자이기 때문에 그런 데에서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위치가 된다는 것에서 굉장한 영광이죠. (기자 : 저희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기쁩니다.)


10. 우리 환우들을 진료실에서 만나시면 어떤가요?

가끔 환자들 진료를 하다보면 초중고 친구들 중에 관리를 정말 잘 안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어린 친구들의 어머니들 경우에 혈우병 모임에 참여도 잘 안하시구요. 약간 창피하게 생각 하시는 거예요. 굳이 이런 모임에 참여를 하지 않아도 재단이든 병원에 가서 약만 타고 우리아이에게 주사만 놓아주면 정상처럼 산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굳이 내 신분을 노출해가면서 이런 모임에 나와서 엮이기가 싫은 거죠. 가장 큰 문제가 뭐냐면 약만 맞으면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거에요. 태권도도 보내고 합기도도 보내고 말도 안 되는 이런 일들을 많이 시키거든요. 그러다가 한 번씩 출혈이 되면 병원에 와요. “선생님 우리아이는 유지요법도 잘하고 주사도 충분히 맞히는데 발목이 출혈이 돼서 왔습니다.” “아 그래요. 학교에서 넘어졌나요?” “아니요. 태권도 하다가 그랬어요.” 깜짝 놀랐죠. “축구하다 그랬어요.” 깜짝 놀라죠. “아 어머니 그런 운동을 시키시나요?” “못 할 것 있나요. 약이 좋은데. 유지요법 다 했어요. 건강한 애들도 다치지 않나요?” 저한테 그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혈우병성관절증이 왜 무섭냐면, 일반인은 지혈에 필요한 인자가 항상 100% 유지가 되기 때문에 출혈이 돼도 바로 멈추죠. 관절이 소량의 혈액에 노출되더라도 큰 문제 없이 호전되는데요, 혈우병 환자들은 유지요법을 해도 출혈이 되면 그게 관절 안에 쫙 퍼지거든요. 아까 말한 것처럼 혈액은 관절 조직을 파괴하는데 한 두 번은 괜찮지만 반복되다 보면 관절이 순식간에 망가져요. 유지요법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유지요법을 해서 출혈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한데 잘 모르시는 분들은 “내 아이는 그렇게 안 될 거야 주사 잘 맞으니까” 좋은 상상만 하죠. 그러면서 장년층들 다리 절고 목발 짚고 다니고 하는 걸 창피하게 생각하시죠. 왜 그렇게 됐는지를 생각해야 돼요. 

물론 저도 의사지만 이미 다 망가졌고 혈우병성관절증 마지막 단계에 와있죠. 콩팥 같은 경우에도 두 개지만 하나만 있어도 큰 문제없고 간도 10%만 남아있어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다고 해요. 혈우병성관절염이 오게 되면 연골이 녹아서 없어지고 완전히 골막이 드러날 정도까지 되면 못 걷고 무척 아프지만 연골이 조금이라도, 0.5mm만 남아 있으면 걷는데 전혀 지장이 없어요. 그래서 유지요법을 잘 하고 출혈이 안되게 지키는 게 혈우병성관절증 진행을 획기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겁니다. 격한 운동 대신 근력을 기를 수 있는 운동을 찾아서 하고요. 

   
▲ 총회 4일차 ‘코리안디너’에서 박정서 회장, 이강안 원장과 함께(손 포즈는 함께 골프 치러 가자는 약속이었다)

11. 선생님도 유지요법을 하시나요?

예. 일주일에 3일, 4일 정도 수술하는 날이 있는데 하루 종일 수술하는 날은 아침에 주사를 맞고, 반나절 정도 수술하는 날은 저녁에 한 번 맞고 다음 날까지 버티죠. 왜냐면 약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그런 식으로 유지를 많이 하죠. 그리고 출혈이 되면 다 아시잖아요. 느낌이 와요. ‘아 이거 출혈이다’ 본인이 그걸 알아야 되는 게, 관절염 때문에 아픈 건지 출혈이 생겨서 아픈 건지 구분을 할 줄 알아야 돼요. 출혈 때문에 아픈 느낌이 오면 무조건 바로 맞아야죠. 우리 환자분들 감기 기운만 느껴져도 주사 맞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러면 안 되고요...(웃음) (기자 : 드시는 진통제가 있으신가요?) 기존에 나온 약들은 립셉타라는 통증 담당 수용체를 차단하면서 위, 콩팥, 심장 등으로 가는 수용체를 같이 차단해 버리니까 위장장애가 생기고 콩팥이 망가지기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 약들은 통증을 담당하는 수용체에만 소염작용을 해서 안 아프게만 하거든요. 콕스-2인히비터라고 하는데 말단부 수용체만 차단하는 세레브렉스 같은 약을 장기복용 하고 있어요. 타이레놀 계통 약은 중추계 쪽에서 통증을 차단하는 거여서 머리 아플 때도 먹지만 관절 통증 있을 때 동시에 두 약을 먹으면 효과가 큽니다. 평소에 많이 안 아플때는 세레브렉스만 먹고 조금 활동이 많거나 많이 걷는 날은 타이레놀과 같이 복용을 하고 있어요. 


12. 우리 혈우환우들이 정형외과적 관리에 있어서 가장 놓치고 있는 부분은 어떤 게 있을까요?

일단은 인공관절에 대해서 너무 맹신을 한다는 점이 제일 큰 부분인거 같네요. 제가 제일 많이 받는 질문 중에 인공관절을 해도 될까요? 지금해야 되나요? 하고나면 결과가 어떤가요? 하는 질문들이 있거든요.

'지금해야 되나요?'에 대한 정답은 최대한 늦춰라. 정말 내가 통증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자고 삶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될 때 하시는 거고요. 또 '인공관절을 해도 되나요?'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건강한 사람들보다 인공관절에 대한 리스크가 좀 높아요. 첫 번째, 인공관절에 있어서 제일 무서운 게 뭐냐면 염증이거든요. 일반인들도 염증이 3% 정도에서 생기는데 염증이 생기게 되면 돌이키기 어려워요. 무릎뼈를 다 잘라내고 그곳에 인공관절을 심어놨기 때문에 그곳에 염증이 생기면 수술을 3~4번해서 인공관절을 들어내고 염증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다 염증항생물질이 있는 시멘트를 6개월간 심어놔요. 6개월 뒤에 그걸 제거하고 다시 새 인공관절을 심는 굉장히 복잡한 과정인거죠. 일반인들도 염증이 제일 무서운데 혈우병 환자들은 출혈 때문에 염증 확률이 훨씬 높아요. 세균이 혈액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수술 후에 출혈이 되면 자칫 천연 세균배양지가 되는 거죠. 염증이 너무 심해져서 인공관절이 불가능해지면 뼈하고 뼈를 그냥 붙여버리게 되는, 최악의 경우 뻗정다리로 살아가야 하는 수도 생기게 되는 거죠. 아무리 수술이 잘돼도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를 하면 정형외과 선생님들이 싫어하실 수도 있지만, 저도 환자이니까 제가 들은 지식과 공부한 것을 환자들한테 솔직히 얘기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혈우환자들은 인공관절에 대한 리스크가 너무 높아요. 물론 통증이 너무 심하고 다리가 X자로 되어 목발이나 휠체어 밖에 방법이 없으신시는 환우분들 케이스는 인공관절 수술을 해야죠. 정확한 지식과 경험이 많은 의료진에게서 인공관절의 시기와 필요성의 판단을 받고 그런 의사한테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저도 노력을 많이 하고 수술경험을 쌓아서 나중에 혈우환자 수술을 하게 된다면 지금의 이런 조심스러움이 자산이 되겠죠. 


13. 말씀 중에 3%의 염증 확률은 개인의 특성에 따른 건가요? 아니면 관리가 잘 안돼서 인가요?

교과서에도 나와 있어요. 원인이 없어요. 요새 많이 받아들여지는 학설 중 하나는 유전적 요인이 있어요. 약에 대해 항체가 생기는 것도 유전적인 게 크거든요. 염증도 개인적인 특성인 것으로 보입니다. 혈우환자가 염증 때문에 너무 인공관절 수술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지만 필요 이상으로 맹신해서 성형수술 하듯이 양 무릎, 고관절까지 다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만약에 기회가 돼서 저한테 진료를 받으러 오시게 된다면 제가 X레이를 찍어보고 인공관절의 시기나 얼마나 연골이 남아있는지, 근육상태가 어떤지, 인공관절을 했을 때 얼마나 좋아질 수 있겠는가에 대한 판단은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흰머리는 ‘원장’ 타이틀에 맞게 일부러 염색하지 않고 있다는 이상훈 원장

14. 의료쪽에 종사하는 환우분들이 가끔 모이신다고 들었는데요. 

황성호 박사, 이강안 원장님, 저, 의료계통에 있는 사람들 1년에 한번 식사 자리를 갖기도 해요. 그분들하고 모여서 단체를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예를 들면 환우들 전문직 중에 변호사도 있고 회계사, 검사, 약사, 한의사도 있고 저와 같이 의료계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 명단을 취합해 봤었는데 한 스무 명 돼요. 그분들하고 모임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좋은 아이디어도 많이 나왔고 지금까지 친숙해지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거죠. 그런 모임을 처음 추진을 했던 이유는 환자단체도 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사회지도층까지는 아니지만 제3자가 봤을 때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환자일 경우에 아무래도 대화가 더 진전될 수 있기도 하거든요. 아직 추진 동력이 약하고 지역도 흩어져 있고 예산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활성화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향후에 잘 추진되면 코헴회 모임에도 같이 자연스럽게 융합해서 어린 환자들한테도 직업 선택에 조언도 줄 수도 있고 더 열심히 자기 길을 찾는 데 동기부여도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혹시라도 인터뷰 보시는 환자 분들 중에 모임에 참여를 원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셔요. 큰 힘이 될수 있을 겁니다.


15. 가족은 어떻게 되시나요?

제가 스무 살 때 아내(당시 18세)를 처음 만났고 연애를 오래 해서 스물 아홉 때 결혼했어요. 아내는 해부학을 전공한 박사고 아들 둘(11살, 7살)을 낳았죠. 처음엔 딸이 생기면 어떨까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그렇다고 일부러 딸을 안 낳은 건 아니고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딸이 나오면 보인자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다행히 아들 둘이 생겨서 잘 키우고 있고 건강해요. 그리고 아내에게 고마운 게, 해부학 박사를 따면 교수를 할 수 있잖아요. 우리나라 대학에서 교수를 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가야하는데 사실 유학을 가려면 아들 하나를 더 키우는 것과 같거든요. 그런 면에서 아내가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제 약도 외국에서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함께 유학을 가는 게 어렵겠다고 아내가 판단을 했고 꿈을 포기하고 지금은 전업주부로 지내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경험자로서 얘기하자면 우리 환우들은 결혼을 진짜 잘해야 해요. 무조건적인 헌신이 중요하다는 건 절대 아니고 우리 몸이 아픈 것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야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제 아내도 똑똑하고 욕심도 많지만 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기 때문에 가족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결론적으로 저는 장가를 잘 갔습니다.(웃음) 

   
▲ 총회 이후 런던에 들러 추억을 함게 한 이 원장의 단란한 가족들

16.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셀럽은?

연예인이요... 와~ 글쎄요. 저는 특별히 좋아하는 연예인은 없는데, 조용필씨를 좋아해요. 왜냐면 누나가 두 분 계시는데,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큰 누나가 대학생이었거든요. 대학생이니까 운전을 할 수 있잖아요. 운전을 하다 보면 차에서 노래를 듣는데 그때 큰 누님이 조용필을 진짜 많이 좋아했었어요. 그래서 누나하고 항상 차를 타면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대학시절에 차가 있으면 놀러도 다니고 싶고 할 텐데 동생이 아프니까 아침에 학교 데려다주고 끝나면 데리고 오고 큰 누나가 저 때문에 대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동생을 위해서 그런 걸 다 희생했죠. 지금도 제가 큰 누나를 좋아해요. 큰 누나가 항상 조용필 노래를 따라 부르고 해서 지금도 많이 부르고 있어요. 저번주에 큰누님에게 차를 한 대 뽑아 드렸는데 그 때 기뻐하시는 누님 모습을 보며 너무 행복 했습니다.


17. 조용필 노래 중에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면요?

'꿈'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그 노래의 주제가, 고향을 떠나 힘겹게 살면서 지금 내가 힘들지만 고향의 익숙한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꿈을 꾼다는 거에요. 저도 힘들거나 그럴 때 그 노래를 들으면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노래방 가서 '꿈' 노래를 부르면 교수님들도 좋아하시더라고요. 하하하. 한 번 불러보세요. 노래도 어렵지 않은 게 되게 좋아요. 


18. 우리나라 혈우사회에 바라는 점

아~ 마지막 질문이 제일 어렵고 제일 무거운 질문인거 같네요. 일단은 어려운 질환이 혈우병만 있는 게 아니죠. 우리나라에만도 다른 희귀난치성질환이 많이 있거든요. 항상 공무원들이 하는 얘기가 그거에요 "너희만 있는 게 아니다. 왜 우리가 너희만 지원을 해야 하느냐. 왜 너희만 불만이 많지? 왜 너희만 약을 더 줘야 되냐" 틀린 말은 아니에요. 우리나라가 아직 그런 희귀난치성질환들을 모두 커버하기에는 공무원들의 마인드나 정부 예산도 그럴 수 있겠고, 정치가들의 생각도 많이 미비하죠. 혈우병에 있어서 약은 우리나라 시스템에서는 어느 정도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을 해요. 단지 중요한 건 혈우병 환자들을 위한 클리닉과 환자 단체와 행정을 지원하는 세 파트가 유기적으로 협력해야 해요. 클리닉은 혈우병 환자만을 위한 진료를 볼 수 있는 집합체, 즉 병원이 있어야 되고, 그러려면 혈우병 환자들만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해요. 그걸 정부가 하든지 아니면 혈우병사회에서 지원을 해주든지요. 두 번째는 혈우병단체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목소리를 많이 낼 수 있게 힘을 더 많이 키워야 해요. 그래서 혈우병 환자들의 권익이나 사회적 역할이나 의료환경이나 제도 그런 것들에 대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로 성장을 해야 되는데 그런 성장을 하려면 그런 단체를 이끌 수 있는 구성원들이 너무 환자들 위주로만 목소리를 내는 것 보다는 전문 경영인처럼 월급을 주더라도 유능한 사람을 데려와서 조직을 좀 더 체계화시키고 규모화시키고 잘 정비를 해서 단체를 이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우리환자단체가  조금 더 강력해지고 전문성을 갖추려고 한다면 전문적인 사람을 영입을 해야 되지 않나 싶어요. 앞으로 우리 혈우사회 구성원들이 해야 하거나 나아갈 길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19. 다음 릴레이주자 추천 부탁드립니다.

오늘 먼 스코틀랜드까지 와서 릴레이인터뷰를 하게 되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이렇게 짧은 시간이지만 할 이야기도 많고 서로간에 나눠야 할 주제도 많고 아주 뜻깊은 시간이 되었던 것 같고요. 저는 혈우병 환자이지만, 의료 일선에서 일하는 의사로서 어려움도 많고 힘든 점도 많지만 요새 의료환경이나 약이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나 저와 같은 선에 있는, 한참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 저와 비슷한 사회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구성원으로서의 사람들을 보고 조금 더 희망을 가지고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저한테도 보람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그냥 ‘내가 아프니까 나는 못하겠지’ 라는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노력을 하면 충분히 나도 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을 했으면 좋겠고요. 다음 릴레이주자를 선택해 달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제가 의사이다 보니까 같은 의사이면서 혈우병을 가지고 있는, 분야갸 좀 다르기는 하지만 대구에 있는 정재민 선생이 성형외과 원장님이신데, 정재민 선생님도 제가 느끼고 있는 것처럼 많은 걸 느끼고 있을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정재민 원장님한테 다음 릴레이주자를 넘겨서 인터뷰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오늘 인터뷰를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 좌측부터 김태일 기자, 이상훈 원장, 황정식 기자

두 시간 넘게 낯선 이국 땅에 앉아 얘기하면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의사사회 뒷 이야기, 관절 속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최초’라는 수식어는 영광되지만 그것을 이루기까지 흘린 땀과 눈물의 가치를 읽었을 때 더욱 빛나는 것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혈우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는 이상훈 원장의 마음이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새 길을 개척하며 곧게 뻗어나가길 바라며, 혈우인 후배들에게도 좋은 거울이 되어줄 것을 기대한다. 귀한 시간 내어준, 그리고 기자들에게 맛있는 파스타도 사주어서(!) 대단히 감사하다.^^

[헤모라이프 김태일 기자 / 김승근 주필]

 

김태일 기자 saltdoll@newsfin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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