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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모필 Movie Feel> '세 얼간이'

기사승인 2016.06.27  23: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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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우사회인이 쓰는 '응고되지 않은' 영화평, 네 번째

우리 현실의 자화상 부수기와 한계,
그리고 혈우인으로서 바라본 '세 얼간이'

   
▲ 김형석 객원기자

영화 ‘세 얼간이’는 이미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영화이며 여러 교훈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도 권장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미 고등학생 시절 이 영화를 본 경험이 있었다.

영화 세 얼간이는 경쟁구도의 학업에 대한 불만과 답답함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많은 공감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한 뒤 공대생이 되어 파르한, 라주, 란초와 같이 엔지니어의 길을 걸어가는 공학도의 시선으로서 다시 이 영화를 접하였을 때, 나는 고등학생 시절에 감상했던 것과는 또 다른 영화 ‘세 얼간이’가 있었다.

영화는 파르한이 비행기가 이륙하는 시점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심장마비가 발생한 것처럼 연기를 하며 재치 있게 상공에 뜬 비행기를 다시 공항으로 착륙시킨 뒤 도망가면서 시작된다. 파르한은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택시기사에게 자신이 예약했다고 하며 그 택시를 타고 급하게 어딘가로 달려간다. 라주 또한 급하게 달려온 파르한의 말을 듣고 바지를 입는 것도 잊고서 파르한과 함께 택시를 타고 어딘가로 달려간다. 이들이 찾아가는 것은 바로 또 다른 친구 란초인데, 이 이후 전개되는 세 친구의 학창시절 회상에서 보이는 란초는 신비롭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특수한 인물이다.

   
▲ 2011년 이후 꾸준히 사랑받고 회자되는 영화 '세 얼간이'

그는 처음부터 다른 신입생들과는 달리 질 나쁜 입학전통을 따르는 것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후배를 괴롭히던 선배를 어린 시절 배운 간단한 과학적 원리들을 응용하여 응징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생활 속에서는 문제가 일어날만한 생각은 숨겨온다. 그러한 자기 자신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였을 때, 우리가 속해있는 커뮤니티에서 소외당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사고와 가치관을 거리낌 없이 남에게 표출한다.

예를 들어, 현재의 교육시스템에 대해 대다수가 불만을 가지고 있다. 이론적인 이해가 필요한 것 같지만 사실 한없이 외우기만 하는 창의성이 결여된 교육은 ‘어째서 이것을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와 ‘돈을 잘 벌기 위해서’등의 답답한 이유밖에 달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교육시스템을 정면에서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부당함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순응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란초는 달랐다. 영화 초반에 한 교수가 그에게 기계에 대한 정의를 물어보자 그는 알기 쉬운 말들로 설명을 한다. 그러나 교수는 그런 란초를 꾸짖고 ‘점수 잘 받고 싶으면 책에 있는 정의를 써라’라고 한다. 교수는 심지어 교실에서 나가라고까지 발언하는데, 그는 결국 학생들에게 정의를 암기시키는 것이 수업의 목적인 것이다. 여기서 란초는 교실에서 퇴장당하면서 실수로 놓고 갔던 책을 다시 가지러 온다. 이때, 교수가 다시 이곳에 온 이유를 물어보자, 란초는 교수가 요구했던 ‘복잡한 정의 방법’을 사용하여 교실을 나가면서 놓고 갔던 책을 복잡하고 재치 있게 서술함으로서 우리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

무조건적 암기보다는 개념에 대한 이해, 우수한 성적보다는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나 다 올바른 것이라고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이 현실에 순응하게 요구받는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며, 위와 같은 교육으로 바꾸려면 교육의 플랫폼을 전반적으로 뒤집어야하며, ‘줄 세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접 실제로 겪고 있는 문제이기에 더욱 공감이 되었다. 학교에서 몇몇 과목들은 시험문제를 전공 책에 들어 있는 문제를 가져와 사용한다. 이것은 학생에게 원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문제 풀이를 암기하는 것을 부추기는 것이다. 더 재밌는 것은, 원리를 이해하고 문제를 푸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책에서 그대로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것이 더 좋다는 학우들도 많다는 것이다. 이미 오랜 시간동안 받은 교육 때문에 길들여져 버린 것이다.

   
▲ 기성세대, 흔히 말하는 '꼰대'의 표상과도 같은 인물로 나오는 총장과의 갈등...그건 세대를 거듭해도 끝이 없는 사회변화의 동력이기도 하다.

이런 교육시스템의 전형적인 결과물은 영화 내 ‘차투르’라는 인물이다. 영화 중반부, 차투르는 총장에게 잘보이기 위해 스승의날 개회연설을 하기로 한다. 사서는 힌디어로 차투르에게 연설문을 적어주었는데, 차투르는 연설문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모두 암기하려고만 한다. 이때, 란초는 그의 연설문의 단어들을 바꿔치기 한다. 예를들면, 헌신이라는 단어를 강간이라고 바꿔버린다. 연설문의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 무작정 암기만 한 차투르는 이 바뀐 연설문을 가지고 그대로 스승의 날 연설해버리며 우리에게 큰 웃음을 준다. 란초는 이와 같이 우리가 모두 눈감고 있는 불편한 현실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우리에게 통쾌함과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즉 이 영화에서 란초가 보여주는 교육시스템과의 갈등을 통해 감독은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알아가는 즐거움 보다는 성적을 중요시하게 되어버린, 알기 위한 공부가 아닌 시험을 위한 공부가 되어버린 본말전도 상태의 교육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과제물을 만들다가 시간이 부족해진 조이로보는 과제제출 기한의 연장을 부탁하지만, 총장은 단호히 거절하며 조이로보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이 올해 졸업을 못한다고 통보한다. 이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조이로보는 자살하고 란초는 이를 가지고 총장에게 항의한다. 이때, 란초는 ‘서커스 사자도 채찍의 두려움으로 의자에 앉는 것을 배우지만 그런 사자는 잘 훈련됐다고 하지 잘 교육됐다고는 안합니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한마디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영화가 끝날 때 까지 이 대사가 기억에 남았다. 왜냐하면 저것이 공학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전공을 공부하면서 들었던 말은, ‘여러분들은 잘 훈련된 엔지니어가 되어야합니다’라는 말이었다. 물론, 공학의 특성상 자신의 주관이나 직관보단 학문적 기반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맞을 수 있다. 왜냐하면 엔지니어의 잘못된 설계는 삼풍백화점 붕괴나 성수대교 붕괴와 같이 여러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리의 이해조차 원하지 않는 교육이나 흥미나 창의성이 결여된 교육이 올바른지에 관해서는 우리 모두 의문을 던지고 그것에 저항해야 하지 않을까.

   
▲ 역시 인도영화! 뜬금없는 군무와 엉뚱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유쾌한 '발리우드' 영화였다.

란초는 교육에 대한 비판 이외에도 그의 친구들 또한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란초의 친구 파르한과 라주는 현대사회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정한 공학자라는 꿈 때문에 프라한은 자신이 원하는 사진작가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이 대학에 입학을 했다.

라주는 미혼의 누나, 은퇴한 어머니, 전신마비의 아버지라는 열악한 집안환경과 금전적 형편이 어려워서 항상 집안걱정과 근심을 않고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때문에 가계의 명운이 걸려있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미래에 대해 한없이 두려워하며 살고 있었다.

이 두 친구들에게 그는 '성공을 위해서가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의 재능을 따라가면 성공은 저절로 온다'고 말한다. 파르한이 보내기를 포기한 편지를 대신 보내주어 파르한의 꿈을 열어주었고, 파르한이 아버지를 설득하고 자기가 원하는 삶인 사직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며, 불미스러운 사고가 있었지만, 그것을 발판삼아 성장하여 더 이상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취업에 성공하게 도와준다.

   
▲ 어렵게 사진작가의 꿈으로 나아갈 것을 결심한 파르한

그러나 결국 영화 세 얼간이 또한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존재했다. 영화 후반부 장면 중, 란초를 찾아 떠난 친구들은 우여곡절 끝에 란초와 만나게 되고 란초가 ‘푼수쿠 왕두’라는 이름으로 과학자이자 선생님이 되어있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누가 더 성공할지 내기했던 친구 차투르 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주입식 교육의 표본이었던 차투르는 비록 성공했지만 란초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 장면은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나아간 사람이 단순히 돈, 사회적 지위만을 목적으로 인생을 나아간 사람보다 더욱 가치 있다고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차투르도 충분히 크게 성공해있다는 것이다. 란초가 추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삶을 나아간 차투르 또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심지어 파르한과 라주보다도 더 큰 성공을 거두어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란초처럼 성공하는 것 보다 차투르와 같이 성공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우리는 란초와 같이 친구들과 놀면서 시험에서는 1등을 차지 할 수 있는 두뇌가 없기 때문이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말하고자 하지만, ‘교육은 ~해야 한다’라고만 주장할 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인지 해답을 보여주지 못하며 주입식 교육이 완전한 악이라고 할수 없다는 점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꿈을 관철하고 추구하라고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란초와 두 친구의 성공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낼 뿐, 그 인과관계는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대기업에서 학점 엉망에다가 총장의 자택에 소변을 보고 3층에서 뛰어내린 남자를 뽑아가겠는가. 즉,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회적 폐해들을 거리낌 없이 걷어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권선징악적인 통쾌함을 제공할 뿐이며 그 어떤 것도 현실적이지는 못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꿈을 항해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태도는 한 명의 혈우인으로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혈우병으로 인해 우리의 일상생활은 때때로 남들은 겪을 일이 없는 고통도 맞이한다. 이로 인해 청소년기에 남들보다 더 방황하는 친구들도 많으며,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살면서 남들보다 조금 더 험한 길을 나아가야 하는 만큼, 아픔에 굴복하지 않고 파르한과 라주처럼 자신의 꿈을 찾고 그것을 추구하는 노력이 오히려 반대로 우리의 아픔을 덜어주고 치유해주는 응고인자와 같은 치료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혈우병’이라는 문제를, 넘어서야 하는 삶의 장애물로 만들지 넘어설 수 없는 삶의 벽으로 만들지는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졸업 후 '하늘호수'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꿈을 대물림하는 란초

김형석 객원기자 webmaster@hemophilia.co.kr

<저작권자 © 헤모필리아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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