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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체 혈우병 환우의 ‘2전3기’ 면역관용요법 성공기

기사승인 2019.01.10  1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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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이제 여행을 떠나 볼까? 줄어든 약 가방에 미소가 살짝”

혈우병 중에서도 혈우병이라 불리는 혈우병 항체 환우들의 삶은 우리 혈우사회 속에서도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고가의 치료제로 예방요법이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반감기도 매우 짧아서 출혈이 되면 하루에도 수차례에 주사를 맞아야 한다. 보편적이고 적절한 치료를 받기 위해 여러가지 치료 방법을 알아보지만 고가의 치료제와 엄청난 량의 주사약으로 매번 치료의 어려운 벽을 만나게 되는 일상을 지내고 있는 것이 바로 혈우병 항체 환자이다. 일반 혈우병 환자들처럼이라도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하는데.....

오늘 이야기를 나눠볼 환우는 2전3기의 도전을 거쳐 항체의 어려움을 딛고 ‘항체’딱지를 떼어낸 혈우환우 주희(23세, 충남지회)군의 이야기다. 항체를 없애는 ITI(면역관용요법)를 두 차례 실패한 끝에 마침내 세 번째 만에 성공을 거둔 것이다. ITI는 소위 장기간 동안 대량 투여로 약이 천천히 약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방법으로 환자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의료진의 각고가 필요한 요법이다.

한때 소방관이나 경찰관처럼 사람들을 돕는 일을 꿈꿔왔던 주희군은 이제는 어릴 적의 꿈을 이룰 수는 없지만 항체치료를 마치고 또다른 소소한 꿈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어떻게 항체치료를 성공했는지, 그리고 항체치료 후의 삶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를 만나 들어보았다.

 

   
▲ "항체치료만으로도 삶이 바뀌는 것 같아요." ITI 치료를 마친 주희와의 인터뷰

“안녕하세요. 20대 초반인, 잘생긴 남자 주희예요”

유기자 : 언제부터 항체가 있었는지 이야기 해주세요.

주희 : 이번 항체치료를 하면서 정확히 알게 됐는데요. 제가 태어나서 돌 지나고 나서 엉덩이 쪽에 출혈이 있었다고 해요. 제가 아직 병원에서 진단(혈우병)을 받기 전이었는데, 어머니가 제가 출혈이 난 것을 확인하고 ‘아 얘도 혈우병이구나’ 판단을 하시고 형 약을 맞춘 거죠. 저희 형이랑 외삼촌이 혈우병이었거든요. 그러고 나서 좀 괜찮다 싶었는데, 만 한 살쯤 됐을 때, 재단 의원에 와서 진료를 받아보니까 그때부터 항체가 있었다고 해요.

유기자 : 아, 처음 주사 맞고 나서부터 항체가 있었네요?

주희 : 네, 그랬을 수도 있는데 정확히 얼마의 용량을 투여 했는지에 대해서는 어머니도 자세히 기억을 못 하시는데, 시기상 그때쯤 형 또는 외삼촌이 맞는 약을 투여를 했다가 바로 항체가 생긴 것이죠.

황기자 : 외삼촌도 혈우병 환자였군요? 연세가 어떻게 돼요?

주희 : 네, 외삼촌도 혈우병 환자셔요. 저희 어머니보다 어리시니까, 70년생. 그 정도 돼요. 저희 삼촌이 막내예요.

유기자 : 처음 재단 진료를 받을 때 항체가 있다는 걸 알았군요?

주희 : 네, 처음 재단에 오면 이것저것 검사하잖아요. 돌 지나고 나서 주사를 맞고 재단에 와서 진료를 받아보니까 그렇게 됐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항체 주사약을 계속 맞았죠.

   
▲ "아마도 항체가 생긴건 이즈음이 아닌가 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항체를 겪어온 주희

유기자 : 그럼 처음엔 치료를 어떻게 받았어요?

주희 : 만 한 살 때 재단 가서 진료 봤을 때에는, 그린에이트를 한 번인가? 두 번, 이렇게 맞았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고요. 그 뒤로는 훼이바를 여태까지 쭉 맞아왔어요. 그 이후에 항체치료인 ITI를 세 번 시도했거든요. 두 번은 (항체치료)실패해서 계속 훼이바를 맞아가면서 치료했었습니다.

유기자 : 항체를 가지고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과 위험했던 경험이 있었다면?

주희 : 여러 번 있었죠. 가장 위험했었던 것은 장출혈이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이니까, 17살. 그때 일어났던 일인데, 장출혈인 줄 모르고 그냥 집에서 평상시처럼 있다가, 집에 아버님이랑 저만 둘이 있었는데, 아버지 식사 차려 드리고 속이 좀 안 좋아서 화장실을 갔는데 설사하듯이 출혈이 막 나오는 거예요. 그때 정신이 되게 몽롱하더라고요. 정리를 하고 일어나서 나오려고 했는데 그대로 화장실에서 쓰러졌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식사하시다가 놀라서 저를 질질 끌고 방으로 데리고 왔데요. 정신 차리고 눈 떠보니까 제가 방에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주사 맞으면 괜찮을 줄 알고 열두 시간에 한 번씩 열심히 주사를 계속 맞았어요. 집에서 그렇게 한 3~4일을 버텼나? 그러다가 결국 응급실을 가게 됐는데요. 동네 응급실에서는 안 된다고 해서 서울 강동까지 사설 구급차 타고 올라왔어요. 항체라서 그런지 아니면 장출혈이라서 그런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일단 약을 맞아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출혈이 계속 더 진행만 됐죠.

서울에 와서 이것저것 경험해보고, 여러 환자 케이스를 들어봤는데, 살짝 혈뇨가 나온다거나 약한 장출혈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살짝 출혈이 있는 것이라면 약을 맞아서 괜찮아질 것이라고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약 투여를 했는데도 효과도 없었고, 그래서 결국은 응급실에 와서 수술까지 하게 되었어요. 항체이다 보니 평상시에도 출혈이 나면 일단 약이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유기자 : 약이 전혀 안 들었어요?

주희 : 항체 수치가 자주 여러 번 오르락 내리락 했는데, 고항체였다가 컨디션이 조금 좋으면 다시 항체 수치가 조금 내려갔다가 했어요. 매번 항상 달랐죠. 고항체로 몇 백 BU(항체수치)까지도 올라갔었다가. 다시 조금 내려와서 10 BU나 20 BU정도로 내려가기도 하구요. 그리고 이번에 항체치료하기 전에는 항체가 1BU였거든요. 그래서 치료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약을 맞을 때마다 약 효과가 너무 달라요. 어느 정도 컨디션이 괜찮을 때는 두, 세번 주사 맞으면 금방 출혈이 멎기도 해요. 주기적으로 검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때 그때 주사를 맞을 때마다 느껴지더라고요. 약을 아무리 맞아도 듣지 않을 때에는 그냥 인생 포기하듯이 다 포기하고 알아서 괜찮아질 때까지 계속 끙끙 앓았어요.

   
▲ "그 동안 많이 힘들었습니다. 항체라서 힘들고 어려웠던 것이 한 둘이 아니었죠."

유기자 : 위험했던 경험이 많았네요.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주희 : 어렸을 때부터 여러 번 다쳤어요. 저는 양쪽 무릎을 다 수술했어요. 수술하기 전에 중학교 때까지는 출혈이 많아서 뭘 할 수가 없었어요. 어딜 가든 출혈이 났고 뭘 하든, 어떤 것을 하든 간에 출혈이 계속 났어요. 친구들이랑 놀러 갈 때도, 가족이랑 여행 갈 때도, 집안 행사 참여를 할 때도, 항상 무릎이나 발목에서 계속 출혈이 나는 거예요. 출혈이 얼마나 자주 있었느냐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양쪽 무릎이 번갈아 가면서 되곤 했습니다. 좀 괜찮아졌다 싶으면 이 주나 삼 주에 출혈이 됐어요. 일단 출혈이 되면 일반 환우들은 빨리 약을 맞으면 됐지만, 저는 출혈이 나면 항체라서 약 효과를 못보다 보니까 일상 생활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유기자 : 약 효과를 못 봤다면 약이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였겠네요?

주희 : 네, 그래서 학교를 거의 못 가다시피 했어요. 출혈이 나서 부어 있는 상태에서는 삼일 정도 쉬면 나을 것을 가지고 학교에 나가면 일주일 이상씩 출혈이 되니까요.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거의 학교를 가지 못했습니다.

유기자 : 여러 번의 실패이지만, 결국 ITI(항체치료)를 성공하게 됐었는데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주희 : 제가 두 번 실패하고 나서 항체치료하는 것을 포기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이걸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코헴(혈우병 환우회) 사무국에서 일하게 되었잖아요. 그렇게 일을 하게 되고 나서, 재단의원에서 진료를 자주 보다 보니까 유기영 원장님께서 항체치료를 추천해주셨어요. 추천해 주시기 전에 먼저 검사를 한 번 했었는데, 항체치료가 가능한 수준으로 낮게 나온것이죠. 진료도 자주 볼 수 있고, 좋은 기회가 되어서 바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황기자 : 그 전에 실패했던 이유는 뭔가요?

주희 : 이번 치료는 두 번이나 실패했다가 다시 치료를 받은 것인데요, 과거 두 번의 치료 할 때에는 제 몸이 너무 힘들었어요. 이번에도 치료하는 기간 동안 많이 힘들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진짜 힘들었어요. 그때는 학교 생활도 하고 출혈로 아플 때엔 너무 아팠거든요. 이번에 항체치료 할 때에는 출혈이 자주 있지는 않아서 그나마 괜찮았는데, 예전에는 많이 아프다 보니까 일주일에 한 번, 이 주일에 한 번 이렇게 출혈로, 원래 맞던 항체 약도 맞고 항체치료하는 약도 맞아야 해서 주사를 많이 맞아야만 했죠. 제가 한 번에 열다섯 개, 열여섯 개씩 맞았거든요. 그거를 2년 동안 하루에 한 번 혹은, 이틀에 한 번씩 계속 맞았어야 했어요. 주사바늘도 여러 곳 찔러야 해서 나중에는 혈관이 남아나질 않더라구요. 그러다 보니 더 이상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 "그 동안 항체를 치료하기 위해서 ITI 치료법을 두 번이나 했었었죠." 3번의 도전만에 항체를 이겨낸 주희

유기자 : 처음 시도했던 때는 몇 살 때였나요?

주희 : 1차가 중학교 때였어요. 중학교 2학년인가? 그리고 2차가 고등학교 때 한 번하고, 이제 성인이 되어서 이렇게 성공하게 된 것이죠.

유기자 : 그러면 3차 때는 지난 1, 2차 때와 어떤 차이가 있었고, 치료 경과는 어땠나요?

주희 : 1, 2차 때는 항체 수치가 파도 타듯이 계속 왔다 갔다 했어요. 괜찮아졌다가 출혈이 있으면 다시 올라가고, 또 괜찮아졌다가 출혈이 있으면 다시 올라가고요.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 몸도 지치기도 했고요. 이번에 시작할 때는 일단 항체가 낮게 시작해서 그런지, 몸 컨디션도 좋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시작하고 나서 바로 항체가 없어졌다고 하더라구요. 시작하고 1주일인가 2주 뒤에 검사했는데 항체가 바로 없어진 것으로 나왔어요. 그 뒤로도 계속 유지가 되어서 일단 치료 시작이 좋았습니다.

유기자 : 1, 2차 실패를 했기 때문에 3차 치료 때는 체력적으로 관리를 하고 시작했다거나 그런 것은 없었나요?

주희 : 솔직히 특별한 준비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 몸이 좋아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죠. 컨디션이 최상이었어요. 일단 출혈 횟수가 많이 줄었구요, 양쪽 무릎의 수술 후에는 출혈도 거의 없었고, 통증도 없는 상태이다 보니까 컨디션이 매우 좋았던 것 같아요. 이번에도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시작했는데, 시작하고 나서 몇 번 검사 후에 결과가 좋게 나와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기대하지 않고 시작했는데도 결과가 좋게 나와서 시간이 지나가면서 치료 성공이 기대 되더라구요.

유기자 : 이번에 항체치료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주희 : 제가 중간에 한 번씩 주사 맞는 날을 놓친 적이 있어요. 일주일에 월, 수, 금 이렇게 세 번을 정기적으로 맞아야 되는데 주사를 너무 맞기 귀찮을 때가 있었어요. 우리 혈우 환우분이라면 그런 느낌을 잘 아실거예요. 주사를 맞아야 하지만 몸은 힘들고, 그러면 주사 맞는 것이 귀찮아지는 그런 것들이죠. 그러다 보니 중간 중간에 한 두 번 주사 맞는 것을 빼먹기도 했죠. 그리고 또 힘들었던 것은 치료 시작한지 막 1년이 넘어갈 즈음에 제가 욕심이 생겨서 그랬는지 간호사 선생님이랑 원장님에게 귀찮게 굴었어요.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언제 끝나요.”라면서 말이죠(웃음). 예전에 했던 치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하루에 한 번씩 맞고, 한 번 맞는 용량도 제 몸무게가 예전보다 늘었으니 약 용량도 그만큼 늘어나서 엄청 힘들었거든요. 맞아야 할 약이 너무 많다 보니 욕심이 생겨서 “나도 얼른 치료가 끝나고 다른 혈우 환우들처럼 쉽게 주사 맞았으면 좋겠다.”라고 계속 생각나는 것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 "항체치료를 더 많은 사람들이 받았으면 좋겠어요." 주희는 인터뷰에서 더 많은 항체 환자들이 항체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유기자 : 치료기간은 얼마나 걸렀나요?

주희 : 2017년 4월 중순에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한 1년 7개월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유기자 : 어려운 치료과정을 잘 견디고 성공했는데요. 앞으로 우리나라에 ITI 치료가 개선되었으면 하는 점이 있다면요?

주희 : (보험공단의 제한이 있어서) 지금은 딱 10명 밖에 치료를 못해요. ITI 치료 할 수 있는 사람이 제한이 되어있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 그 10명이 꽉 차 있는 상황이라면 누군가가 빠져나가야지만 다른 사람이 치료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 치료 받을 수 있는 인원을 추가적으로 더 늘려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고항체(항체 수치가 높은 경우)같은 경우에는 ITI 치료를 하지 못 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폭 넓게 치료 기준을 완화해서 적용됐으면 좋겠어요. 준우형도 고항체라서 항체치료를 하고 싶어도 기준이 되질 않는데요. 항체 수치가 5BU 미만인 사람만 치료를 해 주는 것 같습니다. 5BU 이상이면 고항체로 분류되어서 보험공단에서 치료 인정을 해주지 않는 것 같더라구요.

유기자 : 보건 당국의 허가를 받아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군요. 그것도 10명까지만?

주희 : 그렇죠. 우리나라가 그렇게 여유가 있지 않은가 봐요. 항체치료하는 것이 돈이 많이 들어 가는 치료이긴 하지요. 그러다 보니 10명이라도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처음엔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항체치료에 성공한 사람들은 아시겠지만 진짜 항체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삶의 차이가 많이 나거든요. 천지 차이예요. 항체를 치료하고 싶은 환우들은 많이 있을 텐데 10명이 항체치료가 끝날 때까지 그냥 기다릴 수 밖에 없거든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우리나라가 좀 더 도와주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유기자 : 10명만 치료를 해 준다고 했는데, 그럼 그 10명이 항체치료가 될 확률이 100%인 것은 아니잖아요?

주희 : 100퍼센트는 아니죠. 저도 그 10명 중의 한 명이었고, 벌써 세 번의 시도 끝에 성공하게 되었잖아요. 제가 이번에 시작하기 전에 누군가가 항체치료가 다 끝났거나, 실패하고 나와서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고요. 누군가 항체치료를 성공하든 실패를 하든 진행하던 사람이 나와야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이제는 여행 갈 때도 약을 많이 들고 가지 않아도 되니까 너무 좋아요!"

유기자 : 항체치료 완료에 대한 소감 한마디 부탁해요.

주희 : 정말로 진짜 요즘 말로 x좋아요(웃음). 완전 끝판 왕입니다. 어느정도이냐면, 아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새로운 삶을 산다고 해야 할까요? 정말로 그 정도로 기분이 좋아요. 왜냐면 그 전에는 삶이 너무 힘들었고, 계속 마음속으로만 긍정적으로 ‘좋게 살아야지’라는 마음으로 살아왔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기회가 되어 시작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좋게 나와서 너무 좋아요. 제2의 삶을 사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몸 컨디션도 좋고요. 날씨가 추워서 조금 관절이 아픈 부분이 힘들기는 한데 확실히 출혈 자체가 줄어들었고, 출혈이 나도 이제는 일반 혈우병 8인자 약을 맞으면 금방 효과가 나타나니까 너무 좋아요. 그 전에는 다른 8인자 환우들이 너무 부러웠는데, 특히 우리 형이나 외삼촌, 그리고 제 주변에 있는 8인자 환자들이 맞는 약이 너무 부러웠어요.

유기자 : 항체치료도 하고 건강도 좋아졌는데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주희 : 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요. 그 중에서도 여행 가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환우분들은 다 잘 아시겠지만 여행 갈 때마다 약을 많이 싸야 해서 가방이 무지 크잖아요. 이제 약의 부피도 줄어들었으니까 여러 곳에 여행을 가보고 싶어요. 그리고 여행가서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요. 중국이나 홍콩 같은데 가보면 놀이기구가 많잖아요. 그런 것들 타보고 싶어요(웃음). 지금까지 한 번도 못 타봤거든요. 겁이 나기도 하지만 항체치료 이전에는 타고나서 다치면 답이 없었잖아요. 또, 해외에 나가서 다치면 어떻게 해결 할 방법이 딱히 있지도 않고요. 그러다 보니 많은 것들을 해 보고 싶은데도 못 해 봤어요. 이제는 도전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졌고, 그런 것들에 도전을 해보려고 합니다.

유기자 : 얼마 전에 청년 환우회 발족이 있었는데 한마디 해주신다면요?

주희 : 안녕하세요, 아직 20대 초반인, 잘생긴 남자 주희예요(웃음). 지난 12월 초에 저희 한국 코헴의 청년회가 발족을 했습니다. 코헴 청년회 발족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리고요, 저도 청년회의 일원으로써 혈우 환우들의 건강한 삶과 미래를 위하여 청년회와 같이 이제 열심히 노력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 할 코헴 청년회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입가에 미소를 머뭄고 여행계획을 세우는 주희군을 상상해 본다. 얼마나 좋은지 말로조차 표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 동안 어려운 세월을 보내온 당신에게 이제 달콤한 20대를 마음껏 펼쳐보라고 응원해 본다. 파이팅!

 

[헤모라이프 유성연 기자 황정식 기자 / 사진·영상=황정식 기자]

 

황정식 기자 nbkiller@hanafos.com

<저작권자 © 헤모필리아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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