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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낳았으니까 손자까지는 봐야죠”

기사승인 2018.12.20  2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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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회 김건일 환우 번불콩 인터뷰

혈우병 환우의 첫 만남. 그곳이 병원이나 혈우재단이 아닌 장소에서 우연한 계기로 만날 경우가 얼마나 될까? 보통 만명당 한 명 꼴로 혈우병 환자가 있다고 하니까 적어도 만명 이상 모이는 곳에는 분명 혈우병 환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혈우병 환자의 특성상 외부에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고, 병원이나 의원에서 제대로 된 진단을 하지 못하거나 혈우병 경증인 경우에는 쉽게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코헴회 대구경북지회의 김건일씨는 이런 부분에서 대단한 행운아다. 혈우사회가 아닌 자신이 속한 다른 모임에 혈우병 환자가 2명이나 있었다니! 우연히 만난 그들의 인연은 이번 2018 한국 코헴회 장년 워크샵에서도 그들의 우정을 과시하였다. 이번에 장년 워크샵에서 만난 대구경북지회의 김건일씨, 그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혈우 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 "가장 행복했을 때요? 그야 물론 딸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였죠."

김기자 :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지만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건일씨 : 저는 경북 경산시에 있고 경산에서도 위쪽으로 올라가면 하양이라는 곳에서 수선집을 하고 있는 47살의 김건일입니다. 사는 곳은 진양이고 일하는 곳이 하양입니다.

김기자 : 경산에는 어떤 것이 유명하나요?

건일씨 : 경산에서 유명한 것이라면 예전에는 사과, 포도 등이 유명했죠. 지금은 날씨가 많이 변해서 사과가 예전만큼 그렇게 유명하지 않습니다. 이 부근 지역인 청송의 사과는 유명하죠 많이 생산되고요. 그런데 경산 사과는 이제 그렇지 않죠.

김기자 : 원래 고향이 경산시인가요?

건일씨 : 태어나기는 대구에서 태어나서 두 살 때 동구 반야월에서 스무 살까지 살다가 스물 한살에 지금의 진양으로 이사왔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이십 육년 동안 살고 있습니다.

김기자 : 하양에서 옷 수선하는 일을 하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건일씨 : 옷이 허리나 기장이 몸에 맞지 않을 때 넓히거나 줄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기자 : 이 일을 오랫동안 하셨나요?

건일씨 : 옷을 수선하는 일을 하기 전에는 세탁소를 아버지에게 물려 받아서 거의 27년동안 하다가 세탁소 일이라는 것이 계속 다림질하고 무거운 빨랫감을 들고 하다가 어깨와 팔꿈치가 많이 안좋아져서 수술을 하고 난 이후에 수선집으로 전향하게 되었죠. 팔꿈치 수술을 지난 5월에 하게 되면서 세탁소를 그만두고 퇴원 한 후 올해 7월부터 본격적으로 수선집을 하게 되었습니다.

   
▲ 지금은 많이 했지만 처음 수술 할 때에는 걱정도 많았다는 김건일 환우

김기자 : 수술 경과는 어떠신가요?

건일씨 : 팔꿈치는 인공관절 수술을 했는데 수술 전 팔꿈치가 엄청나게 아파서 병원 진찰을 받아보니 연골은 다 닳아 없어지고 여기서 더 진행되면 팔이 완전히 굳어버리게 된다고 말하더라구요. 그때는 펴는 각도가 15도, 굽히는 각도가 100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수술하고 나서는 펴는 각도가 5도, 굽히는 각도가 120도 정도 됩니다. 하지만 아직 손목이 잘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다림질 할 때 오른손으로 많이 했는데 출혈이 계속 반대쪽 왼쪽 팔꿈치에 오고 하니까 금방 상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다림질 하는 손은 아니지만 일을 하면서 계속 써야 하니까 자주 출혈 됐던 것 같습니다.

김기자 : 우리 환우들도 팔꿈치 수술을 많이 생각하고 있는데 (팔꿈치 수술은) 의사 선생님께서  회의적으로 말씀하시고 심지어 무거운 물건을 들면 안된다고 하던데요.

건일씨 : 수술을 하고 나니까 무거운 거 들고나면 출혈이 와요. 이렇게 미는 것은 괜찮은데 들기 운동을 하면 팔에 무리가 갑니다. 그래서 드는 운동은 자제를 하고 있지요. 무릎은 무게를 실어서 누르니까 고정이 되는데, 팔꿈치는 고정이 잘 안되는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더구나 무릎 관절은 재수술하는 것도 쉬운데 팔꿈치는 재수술하기도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수술도 한번에 평생 쓸 수 있도록 수술 후에도 굉장히 조심해서 써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김기자 : 그런 팔꿈치 수술의 어려움을 감안하고라도 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건일씨 : 출혈이 자주 오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너무 많으니까요. 세수 할 때도 그렇고 움직일 때도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출혈이 오는 등 문제가 심했죠. 그 정도까지 되면 주사를 맞아도 듣지 않는 수준이 되더라구요. 주사를 맞아도 관절이 탱탱하게 부을 정도로 붓기가 올라옵니다. 이런 상태에서 3, 4일 지나야 붓기가 빠지는데 붓기가 빠지고 난 후에 움직이게 되면 또 재출혈이 되고 그래요.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죠. 물론 인공관절을 한 후에도 조심해야 하지만 수술 후에는 출혈이 줄어들고 통증이 없으니 아주 좋습니다.

김기자 : 어깨 관절은 괜찮으신가요?

건일씨 : 어깨는 인공관절 수술을 한지 5년째 되어 갑니다.

김기자 : 어깨와 팔꿈치를 인공으로 수술하신분은 처음인 것 같은데요.

건일씨 : 어깨는 처음에 수술하기 전에 어깨 인공관절 수술을 하신 분을 만나보고 수술 경과를 물어보고 얘기를 들어보려고 했는데 그런 분을 찾을 수가 없더라구요. 수술하신 분이 한 사람 있기는 한데, 우리 모임에 잘 나오지 않으시고 재단에도 나오지 않은 분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전화로 물어보기에도 좀 그래서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스로 인터넷 찾아보는 등 다른 방향으로 지식을 쌓았죠. 하지만 인터넷으로 찾은 정보는 정상인들이 수술한 케이스가 많고 대부분 60대 이상의 분들이 많더군요. 그래도 그런 글들을 보고나니 도움이 많이 되었고 수술 후에는 아주 만족하고 있어 다행입니다.

   
▲ "자식들이 다 그런거 아니겠습니까?",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김기자 : 지금 하는 수선하는 일은 세탁소 일보다 좀 편하나요?

건일씨 : 많이 낫습니다. 세탁소 할 때보다 수입은 많이 줄었지만 몸이 편하니까 이쪽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수선하는 일은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팔을 계속 움직여야 하는 것 없이 재봉틀만 움직이면 되니까요. 다리만 조심하면 괜찮습니다.

김기자 : 투잡도 아닌 쓰리잡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건일씨 : 아침에 일어나서 다림질 할 것들이나 수선 할 것이 있으면 마무리하고, 11시 40분쯤 되면 LPG 충전소에 가서 12시부터 6시까지 충전소 일을 하고, 가게에 6시쯤 와서 바쁜 일이 없으면 그때부터 퀵서비스 일을 11시까지 합니다.

김기자 : 매우 이른 아침부터 하루를 시작하시는 것 같은데요.

건일씨 : 가게는 보통 10시에 열고 바쁜 일이 있다면 좀 더 일찍 엽니다. 집사람이 저보다 먼저 일어나서 아침밥 하고 정리하고 나면 7시 반에 출근을 합니다. 그럼 저는 7시쯤 일어나서 집사람 출근하는 거 보고 막내 깨워서 씻겨서 학교 보내면 8시 10분쯤이 되죠. 그럼 저는 뒷정리하고 8시 30분쯤 진양에 있는 스포츠 센터에 가서 런닝머신 20분, 자전거 20분씩 운동하고 씻은 뒤 옷 입고 가게에 도착하면 10시쯤 됩니다.

김기자 : 아이들 얘기 해 주셨는데 막내가 몇 학년인가요?

건일씨 : 6학년 입니다. 내년에 중학교 올라가지요. 아들 키워보셔서 아시겠지만 머리가 커질수록 말을 듣지 않습니다(웃음). 제가 맨날 학교 다녀오면 제발 좀 밖에 나가서 놀라고 말합니다. 옛날에는 부모들이 제발 좀 밖에 나가지 말고 공부 좀 하라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제발 좀 밖에 나가서 뛰어 놀라고 하는 것 같아요. 요즘은 아이들은 잘 움직이지도 않으니까 말이죠. 학교에서도 체육이라는 과목이 일주일에 한 시간 밖에 없어요. 거의 형식적으로만 있지요. 그러니까 집에 오면 그냥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만 하는게 일입니다. 그래도 게임하지 않고 책을 보면 뭐라고 하지는 않을텐데(웃음), 아들 녀석도 “아버지, 밖에 나가 놀려고 해도 같이 놀 사람이 없어요.”라고 하더군요. 밖에 나가 놀려고 해도 다 학원에 가 있고, 학원 다녀오면 다 집에 앉아서 노니까요. 딸은 중2인데 학교도 멀고 해서 하양의 동생 집에 있습니다. 중학생이면 아침에 일찍 나가야 하는데 스쿨버스가 다니긴 해도 너무 일찍 옵니다. 일찍 일어나서 등교하기 힘드니까 하양에 어머니와 함께 있는 동생에게 보내서 학교를 다니고 있죠. 진양에 있을 때는 7시 반까지 나가야 했는데 하양에서 다니면 8시 10분에 나가도 되니까요. 예전엔 주말에 집에 자주 오고 그랬는데 이제는 전화도 잘 안하네요(웃음). 교회에서도 한 번 볼려고 하면 다니는 성가대 끝나고 친구들이랑 어디 갔는지 사라져요. 전화하면 “아버지 무슨 일 있어요?”하고 물어봐서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 건 것이 아니라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 했다.”라고 하면 “목소리 들었으니 이제 됐지요?”하고 끊어요(웃음).

   
▲ 사랑하는 아이들. 많이 자랐죠?

김기자 : 오토바이는 오랫동안 타셨나요?

건일씨 : 오토바이를 본격적으로 타게 된 것은 퀵서비스 하면서 오토바이 바꾸고 이제 한 두 달 정도 되었죠. 그 전에는 제가 산에 못 올라가니까 오토바이 작은 것 하나 사가지고 수근이형(이웃 환우)이랑 봄, 가을에 팔공산 같은 곳이나, 영천 같은 곳에 바람 쐬러 가곤 했어요. 오토바이가 작으니까 멀리는 못 가고 주위에 산이나 그 주변 한 바퀴 돌고 오는 용도로 썼죠.

김기자 : 사고는 없으셨나요?

건일씨 : 오토바이 탈 때에는 항시 조심해서 타는 것도 있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오토바이가 昇 달린다고 해도 속도가 70~80Km밖에 나가지 않아요. 그래서 큰 도로는 다니지 않고 자전거 도로 옆에 인도 비슷하게 생긴 도로로 달리고 차 없는 곳을 골라서 다녀요. 그리고 은행 갈 때나 시장 갈 때, 이런 용도로만 사용하니까 크게 사고 날 위험이 없죠. 이십대 철 없었을 때에는 속도 잘 나는 그런 오토바이 타고 다니고 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아요(웃음). 그 때는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고 탔었죠. 하지만 지금은 가장이 되었고 잘못되면 내 가족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아니까 많이 조심하면서 다니죠.

김기자 : 8인자에 중증이신가요?

건일씨 : 예 맞습니다. 처음에 수근이형을 교회에서 만나서 증상을 말하는데 저랑 많이 비슷하더라구요. 수근이형이 그 때 서울에 혈우재단이라는 곳이 있는데 한 번 가서 검사를 받아보면 어떻겠느냐 하고 말했었죠. 하지만 저희 아버지가 저 때문에 사기를 많이 당하셔서 망설였어요. 제가 다치면 막 아프니까 굿도 하고 좋은 음식 먹이는 등 여러가지로 돈도 많이 뜯기고 어머니도 고생을 많이 하셨거든요. 그래서 그 이 얘기를 했을 때 아버지가 막 화를 내시면서 어디서 또 사기를 당하려고 하느냐 하시면서 역정을 내셨어요. 그 때에는 핸드폰이나 심지어 호출기(삐삐)같은 것도 없었을 때였거든요. 그날 수근이형이 조용히 저에게 와서 유 회장(유훈 환우)님 집에 갔다오자 해서 갔었죠. 그래서 아버지에게는 친구집 놀러간다고 하고 유 회장님 집에 가서 그 길로 바로 비행기타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지금은 KTX가 있었지만 그 때에는 기차타고 서울 갔다오면 왕복 8시간 넘게 걸렸거든요.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그 당시 혈우재단이 있는 신설동으로 바로 갔어요. 그 곳에서 피 검사하고 다시 비행기타고 대구로 내려가 집에 도착하니까 저녁 6시 되더라구요. 아버지는 제가 서울 갔다 온 것은 생각도 못하고 계시다가 이틀 후에 혈우재단에서 전화가 왔는데 그 때 아버지가 전화를 받으셨어요. 그러면서 혈우재단에 “내 아이는 서울 간 적도 없고 서울에 무슨 재단이라는 것이 있느냐”하고 되물었다고 하시더라구요. 혈우재단의 의사 선생님이 제가 혈우병 8인자이고 수근이형이랑 같이 와서 주사 맞고 검사를 받고 돌아갔다고 얘기해줬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저에게 “너 서울 갔다 왔냐?”라고 물으셨어요(웃음). 그렇게 혈우재단에 갔다 오고나서 아버지 어머니가 수근이형하고 유 회장님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지금까지 은인으로 모시고 있지요.

   
▲ 혈우병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수근형님, 이제는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고

김기자 : 수근이형님은 그때 같이 진단을 받으신 건가요?

건일씨 : 수근이형은 그 전에 혈우병인 것을 알고 있었고, 저는 교회를 다니면서 다리를 굉장히 많이 절었었죠. 무릎에 출혈이 와서 펴지지도 않고, 코피도 자주 났었는데 한 번 나면 멎지도 않았고, 왼쪽 고관절도 많이 아픈 상태에서 수근이형을 만났더랬죠. 그 때 집이 같은 방향이라 수근이형이 차를 태워 줬는데 차 안에서 그 형이 혈우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라고 묻더군요. 저는 혈우병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공부할 때 생물시간에 잠깐 들어본 것이 다였는데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수근이형도 혈우병인데 그 형이 보기에 저랑 증상이 비슷해 보인다고 하더라구요. 그 때 제가 혈우병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황기자 : 보통 혈우병 환자들이 사회에서 만나서 알게 된 경우가 흔하지 않는데요.

건일씨 : 그 때에 제가 교회다니면서 성경학교라고 성경을 가르쳐주는 곳에 다녔었죠. 1주일에 3번 갔었나 그래요. 거기서 수근이형을 처음 만났습니다. 수근이형도 혈우병 환자 다 뒤져보아도 우리처럼 이렇게 만난 경우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 때에 제가 19살 때였으니까 대략 90년대 초반인 것으로 생각되요.

김기자 : 수술 많이 하신 것으로 보아 수술 요법이 좋다고 느끼시는 것 같은데요.

건일씨 : 예, 제가 처음에 무릎 수술할 때가 11년 전이니까 2007년 정도였는데 그 때만 해도 수술이 많이 두려웠고 나이도 서른 일곱 밖에 안되어서 고민하고 있던 차에 지금 대구경북지회장인 권선복씨가 “수술하고 난 후에 많이 좋아졌다”라며 저에게 권했었죠. 그래서 거기서 힘을 얻어 수술을 하러 서울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입원해 있던 병실에 지금 코헴 간사로 일하고 있는 이남일씨가 옆에 누워있더라구요(웃음). 그걸 보고 나보다 젊은 사람도 수술을 하는구나 하고 힘을 내서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후에는 정말 새 세상을 얻은 것 같았어요. 수술 후 조심히 다니느랴 목발을 2년 정도 짚고 다녔습니다. 다리에 힘들 쓰지 못한 것도 컸구요. 그 때 일도 못하고 큰 아이가 5살 때였는데 걱정도 많이 되고 그랬습니다. 그 당시에 아이 키우는 데에 돈이 많이 들지는 않았지만 더 크면 돈도 많이 들 것 같고 해서 일을 빨리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수술 하길 잘 했다고 생각하고 있죠.

   
▲ 아내와 함께

김기자 : 살아오시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건일씨 : 제 딸이 처음 태어났을 때가 제일 기뻤습니다. 처음 태어난 아이를 처음으로 안아보고 제 품에 안았을 때,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해야 하나요. 제 피를 이은 생명이 저에게서 내왔다는 것이 아주 감격스러웠습니다. 진짜 그 때만 생각하면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계기가 된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 시절에는 집에 들어갈 때가 제일 행복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아기가 있고 집사람이 있고, 그런 것들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것이었죠.

김기자 : 앞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요?

건일씨 : 누구나 다 똑같겠지만 제가 바라는 건, 우리 아이들이 안 아프고 잘 커서 사회에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뒷바라지를 잘 하는 것이 제일이겠죠. 그리고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조금만 더 제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어머니가 나이가 드시고 조금씩 나약해지는 모습을 보니까 정말 어머니에게 잘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 철 없던 시절에는 어머니에게 화도 많이 내고 짜증도 많이 내곤 했었습니다. 몸이 아프고 다리를 절고 그러면 어머니에게 원망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제가 이제 자식을 키워 보니까 어머니에게 그런 짓들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겠더라구요. 지금은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고 계시지만 더 잘 해 드려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기자 : 꿈이 있으시다면?

건일씨 : 저에게 꿈이 있다면 서울경기 지회장님도 말하셨듯이 7, 80까지 안 아프고 잘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자식을 낳았으니까 손자까지는 보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요(웃음). 이제 반 평생 넘게 살았는데 앞으로 아프지 말고 33년만 더 살면 되겠다라고 웃으면서 말하곤 합니다.

김기자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일씨 : 감사합니다.

[헤모라이프 김태일 황정식 기자/ 사진·영상=황정식 기자]

 

황정식 기자 nbkiller@hanafos.com

<저작권자 © 헤모필리아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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