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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기자 테마연재] “왼손은 거들 뿐" 꿈 많았던 어린시절

기사승인 2018.06.15  2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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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봄 시즌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 손완호 기자 편

혈우환우로 구성된 전국의 헤모라이프 객원기자들이 분기별로 하나의 주제에 대해 각자의 경험을 들려주는 ‘객원기자 테마연재’ 코너. 2018 봄 시즌 테마는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이다. 오늘은 객원기자계의 '글로벌 핸섬가이' 손완호 기자의 꼬꼬마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자. 

안녕하세요. 한국코헴회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으면서 헤모필리아라이프 객원기자이기도 한 손완호입니다. 이런저런 코헴회 사업을 통해 혈우사회 구성원들을 많이 만나고 있지만 이렇게 기사를 통해 제 이야기를 하려니 어색하네요. 하핫 오늘은 제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어렸을땐 집안이 어려워 이사를 자주 다녔어요. 그래서 어린시절을 보낸 동네가 어디일까 고민이 많이 되기도 했답니다. 익숙해질만하면 이사가곤 했었으니까요. 그래도 중고등학교 다니는 동안은 한 동네에 있긴했어요. 대구 '대명동'이라는 곳이에요. 대구에서는 가장 큰 동네인데 그 주위를 이사하며 학교를 다녔어요.

   
▲ 어느 봄날, 어머니께도 이렇게 앳된 시절이 있으셨단 걸...

그 시기 의지가 되는 사람을 떠올렸을 때, 음.. 20대에 질문을 받았다면 친구들이라고 말했었을텐데, 사실 가장 많이 의지 되는 사람은 '어머니' 였어요. 많은 사랑을 받고 의지를 하면서도 그게 당연하고 혼자 컸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그건 아닌거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 객지생활을 하면서 더욱 느껴져요. 얼마나 어머니가 힘들게 살아오셨고 저희 남매에게 큰 버팀목을 되셨다는 것을. 그래서 힘들때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도 다시 잡아지고 대단한 의지가 되죠.

초등학고 2학년 때였을거에요. 누구나 그렇듯 굉장한 장난꾸러기였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동네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어쩌다 공사장에서 놀게 되었어요. 벽을 분쇄하며 생긴 날카로운 돌을 서로 던지며 놀다가 이마에 그 돌을 맞아 찢어진 거죠. 통증도 느낄 새 없이 뜨거운 느낌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는데 그게 피 였던거죠. 어리벙벙하게 있었는데 어떻게 어머니가 금방 연락을 받고 놀란 얼굴로 저에게 달려오셨어요. 그런 저를 업고 병원까지 뛰어가셨는데. 어머니 등뒤에 업혀 갈 때의 느낌이 요즘도 생각나요. 14바늘을 꿰맸는데 지금도 왼쪽 눈썹위에 크게 상처가 보여요. 그때 수술해주셨던 의사선생님은 성형수술처럼 너무 예쁘게 잘됐다고는 하셨는데.. 지금 상처보면 아닌 것 같아요. ㅋㅋ 그리고 아홉살 때였나? 동네 나쁜형들에게 걸려 돈을 뺏기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제 여동생이 그 모습을 보고 “우리 오빠 괴롭히지마~~” 하며 달려들던 게 생각나네요. 7살 꼬맹이였는데 말이죠. 

   
▲ 저 맞다구요! 미소년 완호!

어렸을 때 가장 소중했던 보물은 게임기였어요. 어릴때부터 게임을 너무 좋아했는데 집에 게임을 할 수있는 환경이 안되었어요. 게임기 있는 친구집에 매일 놀러가서 몇판씩 얻어 하곤 했었는데 눈치가 굉장히 많이 보였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 올라가자마자 부모님 몰래 동네 신문배달을 했었고 그 돈을 모아 제 돈으로 처음 산 고가의 물건이 게임기답니다. 첫 아르바이트, 첫 디지털기기... 모든 게 처음이라 많이 아꼈던 기억이 나요.

초등학교 때까진 참 많이도 아팠던 것 같아요. 특별히 표적관절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성장통인지 뭔지 갑자기 찾아오는 통증때문에 울 정도로 아팠어요. 그러다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야구를 시작했고 중학교때는 농구에 취미가 붙어 중학교 농구부에도 들어가서 농구를 했었네요. 무리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근력이 붙어 그 이후로 출혈은 자주 없었습니다. 그리고 운동으로 인해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죠. 그 시절 많은 추억이 있었어요^^

   
▲ 앉은 자세와 손의 위치로 봐서, 빤쮸까지 벗고 씻고있었던 것 아닐까... 싶네요.

몸이 아플 때 어떻게 견딜수 있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던데, 특별히 그런 게 있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아픈게 특별하질 않았거든요. 선천적 질병이다보니 어릴때부터 아팠었고 당연히 어느 정도 커서도 아프면 '아프구나, 주사 맞아야겠다' 정도로 생각했었어요. 서글픈 이야기지만 아픔이라는 감정에 면역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 어린시절엔 꿈이 아주 많았었어요. 어릴때는 다른 애들처럼 대통령, 과학자 이랬었는데 중학교 때부터는 농구를 너무 좋아해서 농구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내 몸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계속 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다가 결국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해서 포기하고, 그전부터 조금씩 그리던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렸어요. 만화가가 되고 싶었죠. 

   
▲ 아~ 어렸을 때부터 탈것을 참 좋아했었네요. 호홋

동아리 활동, 아마추어 전시회 활동 그리고 본격적으로 프로 만화가 선생님 밑에 들어가서 바닥부터 시작해 배경까지 전담해서 맡는 '치프어시' 까지 됐었는데 제가 몇 년을 돈 없이 열정으로 일을 했었는데, 그렇다 보니 결국 생활이 안되서 포기했었네요. 자동차와 바이크를 좋아해서 바이크 레이싱 선수도 되고 싶었고요. 정말 쎈말로 헛짓거리(?)를 많이 했었죠. 저희 어머니는 지금도 모르시지만 고등학교때도 어릴때와 마찬가지로 새벽 오후 알바해가며 모은 돈으로 바이크를 몰래 사서 새벽에 연습을 빙자한 드라이브를 하곤 했었네요. ㅎㅎ

저는 타임머신이 있다해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지금 현재도 즐기며 살고 있어요. 과거보다 할 수 있는것도 너무 많고요. 책임은 따르지만 말이에요. ㅎㅎ 다만 진짜 갈 수만 있다면 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으로 한 번 가고 싶어요. 아버지에게 어려서 못한 말과 행동들이 너무 많거든요. 많은 추억이 없어 지금도 생각나면 죄송해지곤 해요.

   
▲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몇 장 안되는 사진

사실 올 봄부터 너무 건강이 안좋긴 하네요. 혈우병 때문이 아니라 다른 걸로요. 눈이든 관절이든, 결국 자기관리가 안되서 그런 것 같아요. 끊는다 끊는다 하는 헬스권을 진짜 끊어야 겠어요. 끊는김에 담배도 끊구요.

어린시절의 저는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철부지 꼬마였어요. 혈우병을 앓고 있긴 하지만 내 병에 대해 부정 아닌 부정을 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응고인자제제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며 철없이 행동했었으니까요. '나는 혈우병이지만 다른 혈우병이랑은 달라', '한 달에 약도 한 번 밖에 맞지 않아' 하며 자랑 아닌 자랑과 자기과신을 했었어요. 어린시절 어떤 꿈을 꾸든 어떤 것을 하고 싶든 결국은 건강이 받쳐줘야 뭐든지 할 수 있는데 다른 평범한 친구들과 평범하게 어울리기 위해 무리도 많이 하고 부정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 20대 때의 풋풋한 손완호. 꼬마는 친구 아들래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이 결국 경험이 되고 추억이 돼서 지금의 제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도 혈우 동생들을 보면 관절이든 건강이든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잔소리로 들릴 걸 알면서도 계속 하게 되네요. 제가 어릴때도 형들이 이야기해주면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죽할까요. ㅎㅎ 그래도 10년이든 20년이든 시간이 지나서도 만날 때 건강하게 만나서 밥도 먹고 놀기도 하고 그러면 좋겠어요. 

   
▲ 지난 1월 미국 혈우단체와의 협력사업으로 뉴욕을 방문했을 때. 가장 오른쪽이 저랍니다. 잘 컸죠?

[글 사진 손완호 객원기자]

 

손완호 객원기자 hemo@hemophil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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