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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라 불리는 혈우병환우 영주씨,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때문…”

기사승인 2018.02.05  02: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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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땐 부모원망…철들면서 미안한 마음 커져”

지난해 연말, 코헴 서울경기 지회 송년회 때, ‘나의 버킷리스트’를 멋지게 발표하면서 가장 큰 호응을 받고 ‘그릴 팬’까지 선물로 받은 분이 있다. 그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오랜 기간동안 간병해, 주변에서 잔잔한 칭찬이 흘러나왔던 분이기도 하다. 부모님 간병으로 코헴회 행사에서도 얼굴을 자주 드러내지 못해, 알고 지내는 환우분들도 몇 명 안 된다고 하신다.

오늘의 미담환우를 이번 ‘번.불.콩(번갯불에 콩볶듯 갑자기 이뤄진)’인터뷰 주인공으로 유기자와 황기자가 만나봤다.

“안녕하세요. 저는 1962년 생으로 올해 57세인 김영주(57세·8인자·중증)라고 합니다. 형제는 2남 3녀 중 제가 제일 맏이입니다. 제 밑으로 여동생이 3명, 그 밑으로 막내가 남동생입니다. 지금은 어머님과 같이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 김영주(57세·8인자·중증)환우 

유기자 : 주변에서 ‘효자’라고 칭찬을 많이 하던데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어떠셨나요?

영주씨 : 글쎄요... 사실 어릴 적에는 겉으로 표출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부모님을 많이 원망 했어요. 내 다리가 너무 부어서 통증이 심하게 왔을 때는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약이라고는 ‘사리돈’같은 진통제밖에 없고, 너무 아프니까 한번 먹을 때 4알씩 먹었어요. 음식은 거의 먹지도 못하고 구토 증상은 계속되고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하니까 어느 날 제가 어머니한테 ‘왜 나를 낳아주셨냐’ ‘너무 고통스럽고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하는 거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게 없었어요. 당시 저의 부모님은 돈을 버시면 저를 작은 병원에라도 한번 데려가서 치료를 받게 해주고 싶어하시는 게 제 눈에 보이더라구요. 그러다보니 제 동생들이 저 때문에 다들 학교를 제대로 다녀 보지 못했어요. 보험도 없던 시절이라 병원에 한 번 갈적마다, 부르는 대로 병원비를 다 주는 시절이었기에... 그래서 늘 부모님과 동생들한테 미안한 맘을 가지고 살아왔어요. 그러다보니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주씨는 거주하고 있는 강서구 구청장으로부터 효행 표창장을 받았다

황기자 : 그래도 형제분이 많으시면 의지가 되지 않으세요?

영주씨 : 하하하... 나는 아픈데 제 동생들은 저를 정상인으로 대해주지 환자 취급을 안 해줬어요. 아픈 것 보이면 그냥 아프냐고 물어보기만 하고 다리가 불편해서 자리 좀 비켜달라고 하면 비켜주는 식이었지 특별하게 나를 위해주거나 그런 거 없이 살아왔어요. 그래도 한 달에 4~5번씩 통화를 할 정도로 형제지간의 우애는 정말 좋아요.

황기자 : 형제분이 많으신데 가족 중에 환우가 더 계신가요?

영주씨 : 저만 혈우병으로 태어났고, 여동생을 제외한 막내 동생은 괜찮아요. 바로 밑에 있는 여동생은 자녀가 2남 1녀인데 모두 괜찮고요. 둘째 여동생은 딸만 2명인데 아직 결혼을 안 하고 있어요, 그리고 막내 여동생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다 괜찮아요.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여동생들이 아직 보인자 검사를 한 번도 안 해봐서... 뭐랄까 혈우쪽으로는 관심이 없는 건지 제가 보인자 검사를 해보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아직 검사를 안 하고 있어요. 왜냐면 결혼을 앞둔 조카들이 있다 보니까 유전으로 (보인자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있고, 서로 바빠서 그런건지 아직 검사를 못해봤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확인을 꼭 해보긴 해야할 것 같아요.

아~ 저의 이모님이 결혼을 하셔서 아들을 한 명 낳으셨는데, 어렸을 때 그만 잘 못됐는데... 그 때는 혈우병이라는 것을 몰랐던 때라, 지금 생각해보면 혈우병으로 인한 출혈이었지 않았나 생각되요. 아들 한 명을 보내고 난 후로 슬하에 자식이 없으셔서 (이모님)돌아가실 때 장례도 제가 해드렸어요. (황기자 : 어머님은 형제분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어머님은 형제분이 3남 2녀셨어요. 맨 위로 오빠가 2명, 그 다음이 어머님, 그 밑으로 남동생, 마지막이 여동생이셨는데, 외가 쪽으로는 이모님 아들만 (혈우병으로)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

유기자 : 혈우병 진단은 어떻게 받게 되었는지요?

영주씨 : 제가 29살에 우연찮게 동아일보의 한 광고지란에 나온 글을 읽어보니까, 그 당시 저의 증상하고 거의 95%가 맞더라구요. 그때는 그냥 제가 앓고 있는 병이 무슨 병일까라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광고지란에 실린) 내용을 보고, 상암동 연세세브란스 병원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어요. 그 당시는 너무 없는 시절이어서 큰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 다는 게 거의 두려움에 가까웠어요. 보험 자체가 없는 시절이었기에 그냥 혈액 검사나 한번 해보자 싶어서 찾아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혈우병 8인자’로 나왔어요. 그때 처음으로 ‘옥타비’를 맞아보고 제 인생이 180도, 아니 360도로 바뀌어져 버렸어요. 그전에는 관절이나 근육에 출혈이 되었을 경우 혼자 말로 ‘이건 열흘’ 아니면 ‘이건 보름정도’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걷지 못하고 지냈었는데, 치료제를 맞고 나면 출혈도 멈추고 통증도 없어져 버리니까 너무 좋은 거에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약이 귀해서 급할 때, 어디 아프다고 생각할 때, ‘피만 멎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주사를 맞아왔어요. 지금도 딱히 예방요법도 안하고 있어요. 그냥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아프다’싶으면 제 스스로 아침, 저녁으로 2.000IU로 맞고 있어요. 몸 상태가 좋으면 일주일도 안 맞는 경우도 있어요. (황기자 : 자연출혈이 생길수도 있을 텐데요) 안 그래도 재단에서 예방요법을 하라고 말씀도 해주셨는데, 솔직히 주사맞는 자체가 싫더라구요. 하하하

   
 

유기자 : 혈우병 진단을 받지 못하셨을 때 어떤 출혈 에피소드가 있었나요?

영주씨 : 음... 제가 4살 때 왼쪽 무릎 관절이 부어서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병원을 갔더니, ‘결핵성 관절염’이라고 말씀해 주셨데요. 그래서 깁스를 6개월가량하고 지냈어요. 요즘은 깁스를 얇게 하는 편이지만 옛날에는 (깁스를) 엄청 두껍게 해줬어요. 깁스 무게 때문이지 왼쪽 다리가 늘어나서 오른쪽 다리랑 길이가 안 맞아 한동안 절뚝거리고 다녔다고 하더라구요.

유기자 : 혈우병 진단을 받고 치료가 많이 달라지셨나요?

영주씨 : 그 당시는 지금처럼 유지요법이라는 것도 없어서, 그냥 약만 타다가 맞기만 할 때였어요. 일하다 보면 약도 못 탈 때도 있었는데, 5회 분량을 가지고도 한 달을 버티기도 했어요. 다행히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는 일을 했던 때라, 관절도 심하게 아프지 않았고 그 덕에 출혈도 자주 안 생겨서 약도 그만큼 안 맞고 살았어요. 그리고 옛날에는 현대 의술보다는 민간요법을 많이 활용했어요. 여러 방법 중에서 심지어 변도 먹어봤고, 하수도 시궁창에 있는 흙을 가져다가 부어있는 무릎에 발라도 보기도 했어요. 물론 미신이었고 근거 없는 일이었지만 정말 안해본 거 없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해본 거 같아요

유기자 : 오래전에 수술을 받으신걸로 알고 있는데요?

영주씨 : 네... 아마 20년 정도 되어 가는데, 경희의료원에서 배대경 교수님께 왼쪽 무릎관절 수술을 먼저 받고 10년 후에 오른쪽 무릎도 수술을 받았아요. (황기자 : 수술 받은 지 20년이 지났는데, 지금 인공관절 상태 괜찮으세요?) 얼마 전에 혈우재단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 본적이 있는데 상태가 아직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관절수술은 아니지만 혈우병을 알게 된 후(혈우병 진단을 늦게 받음) 4개월쯤 지났을 때 창자가 꼬인 적이 있는데, 그걸 3일간 그냥 놔두는 바람에 한 뼘 정도 잘라내는 수술을 9시간이나 걸쳐서 받은 적이 있어요. 그 때 의사선생님이 “이 환자는 수술을 해도 죽고, 안 해도 죽을 텐데 어떻게 하시겠냐”고 어머니께 물어보셨는데, 어머님께서 “죽더라도 수술을 하고 죽는 게 더 여한이 안 남겠다”고 하셔서 보험도 안 되는 시절에 수술은 잘됐지만, 집 한 채 값을 날려먹었어요.

유기자 : 여가시간은 어떻게 보내시는지?

영주씨 : 경기도 장흥에 이틀에 한 번씩 어머니 모시고 다녀오기도 하고, 재단에 약도 타러 다녀 올 때도 있어요. 그리고 아버님을 경기도 포천에 모셔두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다녀오던 것을 요즘은 열흘에 한 번씩 다녀오기도 해요. 그 외에도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다 보면 일주일이 금방 지나가 버리더라구요.

   
▲아버님 생전 이대목동병원에 입원하고 계셨을때 함께 찍은 사진

유기자 :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목표는 세우셨는지?

영주씨 : 제가 7년 전쯤, C형 간염 치료를 하느라 금은 세공 일을 그만두었어요. 지금 나이가 있어 다시 그쪽 일을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서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성동구 왕십리에 있는 장애인 복지관에 가면 ‘전동스쿠터 클린센터’라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전동스쿠터 6개월 과정을 마쳐서 자격증을 따려고 올 4월부터 다녀보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그 전에 한번 다녔었는데, 3개월 만에 고관절에 심한 출혈이 생겨서 강동경희의료원에 한 달간 입원하고 나온 적 있어요. 출혈이 되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중간에 추석이 끼어서 좀 움직이고 다녔더니 재출혈이 생겨서 다시 입원을 하느라, 포기 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어서 시도를 해보려구요. 그쪽 계통이 자격증을 따면 바로 취업이 가능하다고 해요.

유기자 : 끝으로 환우들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영주씨 : 안녕하세요~ 환우여러분 운동합시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스트레칭을 먼저 해줘요. 발목을 돌려주거나, 기지개를 펴주기도 하고 무릎도 부드럽게 풀어주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편이에요. 여러 환우들도 다들 비슷할지도 모르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을 시작 할 때는 항상 근육과 관절을 풀어주고 움직이는 것이 제일 좋은 거 같아요. 그러면 출혈도 덜 생기는 거 같더라구요.

   
▲“건강관리는 우리 환우들이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는, 갑작스런 움직임 보다는 조금 느리다는 말을 듣더라도 천천히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청년환우와 장년환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분명히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 있다. 그것은 ‘혈우병 치료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가’에 따라 몸 상태도 크게 다르고 환우 머릿속에 남아 있는 통증과 고통의 시간에 대한 깊이가 다르다. 청년환우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영주씨처럼 장년층 환우에게는 ‘고통을 참아야 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너무나 뿌리 깊게 남아 있다. 고통의 시간으로 보내야 했던 시간들, 어떤 방법으로든 지나간 그 시간은 보상받을 수 없다. 즐거움보다는 고통의 순간이 더 많았던 환우들. 우리 혈우사회가 어떤 방법으로 이들의 아픔을 안아줘야 할까?

영주씨에게 치료제를 만난 것은 일생일대의 대 전환이 됐다. 이제 모든 것에 자신감을 얻게 됐고, 무언가를 다시 도전해 볼 수 있다는 목표가 생겼다고 한다. 오는 4월부터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영주씨. 그의 목표가 부디 끝까지 완주해 성공하기를 바란다.

[헤모라이프 유성연 기자 황정식 기자] 현장사진=황정식 기자 

   
▲ 한국코헴회 서울경기지회 2017송년회, '나의 버킷리스트' 발표에서 가장 큰 호응을 받아 커다란 선물을 받는 김영주 환우

유성연 기자 tjddus@newsfin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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