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혈우재단의 피하주사 처방 환경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다
▲ 김태일 편집장 |
혈우병 환자단체 코헴회의 여름캠프에서 만난 한 30대 혈우병 환자 이 모 씨는 필자에게 물었다.
"혈우재단에 피하주사는 아직 안들어오는 거죠?"
필자의 답은 '그렇다'였는데, 그 답이 나오기까지 별다른 고민이나 문제의식이 느껴지지 않아서 사뭇 놀랐더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혈우병 환자에게 약품을 처방하고 있는 혈우재단의원에 가능한 많은 치료 옵션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모든 이들이 공감하면서도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어쩔 수 없다'는 방관자적 자세 또한 거의 모든 이들을 물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도 그 중 하나이고, 어쩌면 해당 약품을 공급해야 하는 제약회사 관계자들까지도 같은 생각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모를 일일다.
혈우병 A 피하주사 '헴리브라' 국내 도입 초기에는 처방기준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재단의원에 약을 도입하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게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관계자들의 전언으로는 GC녹십자가 헴리브라의 국내 유통을 담당하는 계약까지 논의되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고. 재단 의약품심의위에 한 두 차례 헴리브라 입고가 상정되기는 했으나 힘없이 미끄러진 뒤로는 이렇다 할 '도전기'도 들려오지 않는다.
정맥주사의 어려움 때문에 피하주사 국내 사용을 간절히 원하던 환아 가족들의 외침도 지난해 7월 처방 '일부'(뇌출혈 이력, 기존 유지요법으로도 잦은 출혈 환자 등) 확대 이후 일정 소강상태에 들어간 분위기이고, 종합병원이나 타 의원을 통해 절반의 공급망은 확보되었기 때문에 그 목소리가 재단의원을 향할 간절함은 크지 않은 상황이다. 피하주사를 원하는 환자들은 별 미련 없이 재단의원을 떠났다.
혈우재단 내부에서도 환자가 줄어든다는 위기의식과 함께 다양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료적 입장에서 피하주사제의 입고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지금도 있다. 하지만 30년 넘게 자리잡아 온 혈우재단의 구조를 극복하기에는 그 소수의 견해가 다소 미약해 보인다. 올해도 피하주사의 재단 약심위 상정은 없는 일이 되었다 알려진다.
▲ 강원도 평창의 서늘한 자연 속에서 환우 이 모 씨와 나눈 대화가 고민의 시작이었다. |
환자 이 모 씨는 대화 말미에 이런 '자체 결론'을 내렸다 했다.
"녹십자나 다른 회사가 피하주사를 출시하면 그때나 재단에 들어가겠네요." 라고.
많은 이들이 예상하고 있는 수순인데, 사실 자체 결론일 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가능성이 더 높은 건 '녹십자가 피하주사 출시할 때'이고, 시기적으로 빠른 건 '다른 회사가 출시해서 8, 9인자 모두 피하 옵션이 생겼을 때'로 보인다.
현재 2개의 혈우병 피하주사 글로벌 신약 후보물질이 미국식품의약국(FDA)에 허가 신청되어 있다. 지난해 말 화이자의 '마스타시맙'(anti-TFPI방식)이 신청되었고 최근 사노피의 '피투시란'(mRNA방식)이 뒤를 이었다. 둘 다 혈우병 A와 B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 혁신 치료제이다. 그리고 노보노디스크의 '마임에이트'(이중항체방식/혈우병A)도 조만간 뛰어들 전망이다. 허가 여부를 지켜보아야겠으나 모두 6~7년 이상 글로벌 임상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해오고 있고, 국내에도 다수의 임상 참여자가 있어 '건강하게 관리 잘 되고 있다'는 아마추어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정보를 속속 전해오고 있다.
두 신약은 빠르면 올해 안에, 그리고 내년 상반기에 FDA 허가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글로벌 임상에 한국인의 참여가 높을 시 한국 식약처의 심사도 FDA의 방향성과 궤를 같이하는 경향을 살폈을 때 우리나라 환자들 앞에 선택할 수 있는 복수의 피하주사제들이 놓이는 시기는 크게 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피하주사제 도입 이후에도 응고인자제제의 발전과 역할은 필수적이며, '8, 9인자 고유의 체내 기능에 대한 논의'도 시작 단계에 있다.
복수의 신약이 도입되어야 하고, 여타 다른 조건들이 부합해야만 비로소 혈우재단의원에서 피하주사제를 처방받을 수 있다는 현실이 서글프긴 하나, 이러한 허들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으면 한다. 복지부에서 내놓는 탁상공론식 처방 제한보다 혈우사회 구성원들 마음 속에 자리잡은 이 '어쩔 수 없어'란 이름의 허들이 더 넘기 어려운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헤모라이프 김태일 기자]
김태일 기자 saltdoll@hemophil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