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중한 것을 위해 변화를 요구할 모두의 용기
▲ 파리올림픽 금메달을 수확한 직후 협회와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한 안세영 선수가 8월7일 인천공항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안세영의 발언으로 체육계가 발칵 뒤집히고 국민들의 관심도 선수와 협회의 입에 집중되고 있다.
사건(?)의 진실은 더 드러나야 알 수 있겠지만 이번 발언으로 인해 변화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불편함' 일 것이다. 안세영 본인은 물론이고 협회 관계자들, 함께 땀흘려 경기에 참가했던 동료 선수들까지도 올림픽이라는 축제를 축제답게 마무리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마이크 앞에 서거나 얼굴을 붉히며 돌아서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다른 남은 올림픽 종목을 지켜보는 시청자들 중에는 '저 선수들에게는 부당한 대우가 없었을까? 마지못해 경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올림픽 중계 보기가 불편해졌다거나 '흥이 깨졌다'는 사람들도 많다는 거다.
올림픽이라는 이벤트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건 우리나라 또는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좋은 성적을 거둔 뒤 메달을 목에 걸고선 자신이 어떻게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 주변 누구누구에게 감사한지, 앞으로 노력해서 더 높은 곳에 오르겠다는 등의 아주 모범적인 발언으로 사람들에게 감동과 낭만을 주는 장면일 것이다. 몇몇은 에펠탑, 몽마르뜨 언덕 배경으로 방송사 화보촬영에 나서기도 하고 귀국 후엔 한동안 토크쇼나 예능에 나와 숨은 에피소드를 전하고 셔틀콕(예를 들면)으로 작은 생수병을 맞추는 진기명기에 도전하기도 한다. 수억원짜리 광고 계약은 덤이다.
그런데 왜 안세영은 이런 감동과 낭만, 영예를 놓아두고 소위 '작심 발언'으로 자신과 많은 이에게 불편함을 안겨주게 되었을까? 적어도 그가 철이 없어서, 금메달이라는 권위를 업고 '당한 거 이제 갚아줘야지' 하는 옹졸한 생각에 포문을 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운동선수 누구에게나 가장 큰 목표이자 영광인 올림픽 금메달을 수상한 자리가 얼마나 값진 자리인지 세계 배드민턴 강호들 속에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안선수일 것이고 '나 아프게 했으니까 너네도 당해봐'라고 앵앵거린다고 생각하기엔 지난 아시안게임 결승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그의 근성과 너무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글 쓰는 입장에서 봤을 때 메달 수상 직후 가졌던 그 인터뷰에서 나온 안세영의 발언 자체는 꽤 예의바르고 정돈된 것이었다. 일 키우고 조회수 늘리기에 혈안이 된 언론들이 얘기하는 '저격', '폭탄선언' 또는 '폭로'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의 치부를 더 자극적으로 드러내고 자신의 피해를 더 신파적으로 펼쳐보였어야 했다. 아직도 언론에서는 "한국 가서 얘기하겠다"는 선수와 협회의 말을 '추가 폭로 예정'이라 받아적고 과거 체육계 분쟁들, 정치권 인사들의 반응까지 엮어 꼭 사생결단을 내야 풀릴 문제로 만들어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지금으로서 확인할 수 있는 팩트는 '안세영의 무릎 많이 아팠다'이다. 이견이 없다. 이를 둘러싼 준비과정과 공정한 육성과정에 대해 진위를 확힌해야 할 부분이 많겠지만 “누군가와 전쟁하듯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선수들의 보호에 대한 이야기임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는 안선수의 입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운동선수에게 몸은 전재산이다. 어느 대회를 나가느냐보다 중요한 건 건강하게 오랫동안 하고 싶은 운동을 하는 것이리라 공감할 수 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몸을 위해 금메달이라는 최고의 영광을 낭만적으로만 누리기보다 불편하지만 당장의 변화를 촉구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혈우병 환자에게도 건강관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평생 안고 살아온 질환이니 어쩔 수 없겠지, 뭔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불편해도 그냥 감수하고 살아가지 하는 순간순간이 쌓여 평생의 건강을 갉아먹는다면 후회는 혈우병 인생의 후반을 잠식할 것이다.
예를 들어 혈우병 치료의 방식이 환자의 생활패턴, 또는 고유 반감기와 맞지 않아 출혈이 잦고 관절질환이 계속 악화된다면 그건 환자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일까? 치료제가 제대로 개발되지 않고 수술도 불가능했던 시기라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훌륭한 치료제들이 충분히 공급되고 있고 적극적인 물리치료와 정형외과 수술요법도 선택적으로 받을 수 있다. 치료제 부문만 보더라도 2~3년 전과 비교해 더 높은 응고인자 수치를 유지할 수 있는 치료제들이 속속 도입되고 있고 잘 인지하기 어려운 '무증상 출혈'까지도 차단해 관절 상태가 오히려 호전되는 연구결과들이 무수히 발표되고 있다. 게다가 현재의 치료제 국내 투여기준으로 충분히 예방요법이 되지 않을 때에는 검사를 통해 투여량을 높일 수 있는 제도도 지난해부터 적용되었다.
문제는 어떻게 변화를 만들것인가 하는 거다. 치료법을 바꿔보자고 환자가 말을 꺼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상대'는 십 수 년간 수련하고 많은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의사란 존재다. 꼭 의사의 권위에 반기를 드는 것 같고 아마추어가 프로를 상대로 내미는 도전장처럼 느껴져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이런 고민에 대해 혈우병 전문의인 신촌세브란스 한승민 교수는 최근 한 건강토크쇼에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그냥 늘상 있는 통증이나, 늘상 있는 출혈에 대해서는 당연시하시는 환자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원래 그냥 갖고 있는, 이 정도는 그냥 내가 견딜 수 있고, 내가 그냥 갖고 살아가는 거야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출혈이나 통증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경험을 하고 계시지만 그렇기 때문에 너무 익숙해지셔서 오히려 얘기를 잘 안 해주시는 경우가 많아요. (중략) 그리고 새로운 치료제들도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까 분명히 조금씩 더 나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환자분들도 ‘이거 어차피 해결 안 되는 문제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얘기 안 하시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래도 상의를 해 주시면 더 좋아질 수 있는 부분들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사도 환자 본인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나 치료적 아쉬움에 대해 적극적으로 피력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당연히 치료제 선택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인 치료법이나 수술, 전반적인 건강관리에 대해 소통해야 할 필요성이 커 보인다. 기껏해야 4주에 한 번 5분 만나는 환자와 의사가 공유하는 것 외에 훨씬 더 많은 경험과 정보를 각자가 가지고 있을텐데. 정작 진료시간에는 서로 웃으며 안부만 묻다가 상대가 먼저 변화의 물꼬를 터 주기만 기대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평행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불편함과 혼돈을 마주하더라도 평생의 건강을 위해 변화를 이야기할 용기가 환자와 가족들에게 없는 걸까? 변화를 추구한다 해서 당장 누구와 전쟁하자는 뜻으로 여길 정도로 수준 낮은 시각은 적어도 현대 한국사회에 존재하지 않을테니 이제부터라도 용기있는 소통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건 '다음에'가 아니라 '지금 당장'. 금빛 꽃길을 마다하고 불편한 소통을 지금 요구한 체육인 안세영에게서 조명되어야 할 긍정적 면이다.
[헤모라이프 김태일 기자]
김태일 기자 saltdoll@hemophil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