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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환우 "한국에서 치료받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기사승인 2017.07.23  12: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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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불.콩. 인터뷰] 북에서 온 청년 김필주 환우와의 만남

대한민국 땅에서 태어나 혈우병 진단을 받고 무상에 가까운 치료를 받으며 자가주사를 배우고 각종 기관을 통해 희귀질환으로서의 지원을 받고 학교나 직장에 혈우병임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물론 힘들고 아직도 위험한 출혈이 삶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지만 어느정도 혈우환자로서 비혈우인들과 어깨 나란히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사회제도와 치료환경을 개척해 온 결과다. 

그런데 우리와 한민족이자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 북한의 사정은 어떨까? 최근 TV 광고에서도 표현되듯이 이제 탈북인들은 더이상 '이방인'이지 않고 사회 어느 곳에서나 자연스레 우리와 섞여 살아가고 있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 혈우사회에도 역경을 뚫고 국경을 넘어와 코헴가족이 된 탈북청년이 있다. 한국에서 자라온 30대 이상의 환우들이 '약 없던' 시절을 회상하면 알 수 있듯이, 아니 북한의 열악한 의료환경에 대해 얼핏이라도 들었다면 알 수 있듯이 이 청년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지는 짐작이 될지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청년의 현재 얼굴에서 그런 그늘을 찾을 수가 없다. 그 이유가 뭘까?

대한민국 혈우가족 김필주 환우를 그가 다니고 있는 가톨릭대학교 교정에서 만났다.


하기자: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른 두 살 김필주라고 하고 탈북청년입니다. 2006년도에 대한민국에 입국을 했고 현재 어머니하고 한국에서 살고 있으며, 가톨릭대학교 늦깎이 새내기로 살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필주입니다.

하기자: 취미생활은?

자전거 타기, 음악듣기... 왠만하면 여럿이 같이 하는 걸 좋아합니다. 밥 먹는 것도 그렇고 영화보는 것도 그렇고 혼자서하는 건 죽어도 싫어합니다. 자전거는 한국에 와서 몸도 좋아지고 대외활동이나 공부나 이런 하고싶은 활동들이 많아졌는데, 체력이 좀 못 따라 가는 것 같아서 체력을 좀 올리려고요. 또 출혈 예방차원에서도 많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 같아요.

하기자: 현재 혈우병 관리는 어떻게?

혈우재단에서 약을 꾸준히 타다가 일주일에 두 번 예방으로 1500IU 맞고 있는데 10회분 모두 타서 쓰지는 못해요. 자주 가지를 못하다 보니까. (하기자: 그럼 약이 부족하지 않나요?) 그렇죠. 약이 다 떨어지면 가죠. 크게 아픈 곳은 없는데, 모르겠어요. 작은 출혈은 제가 못 느끼는 건지 없는 건지. 예방 하다가도 진짜 많이 아프면 주사 더 투여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하기자: 한국에 오기까지 과정은?

북한을 제가 2002년도에 탈출을 했고 그 때 나이가 17살이었는데 중국에서 4년을 체류 하다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하면서 중국이 대대적으로 탈북자들을 잡아내서 북송을 시켰어요. 북송되면 감옥에 가 구타당하면 혈우환자로서 끝나는(죽는) 거니까. 거기는 여기처럼 응고인자도 없고 하니까. 저희 엄마는 중국에 4년 체류하면서 1년에 한 번 꼴로 잡혔었기 때문에 그때 한 번 더 잡히면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한국이라는 곳에서 우릴 받아준다고 하니까 “아들아 갈래?”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결정을 하고 한 보름 정도 준비했던 것 같아요.

하기자: 어떤 준비를...

한국에 입국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지금은 많이 막혔지만 당시는 베트남,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여러 가지 루트들이 있었고 그 중에 하나가 몽골이었는데 몽골은 사막을 헤매다가 죽는 경우들이 많았기 때문에 잘 안 갔었어요. 다른 데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신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기간이 많이 걸렸어요. 당시 정보로는 몽골을 제외한 다른 길들은 최소한 6개월, 길면 2년도 걸릴 수 있다고. 근데 6개월 걸려서 가도 알 수 없고, 3개월 걸려 가도 알 수 없는 길이라면 이왕이면 기간이 짧은 길을 선택해서 하루라도 빨리 결과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3개월 정도 걸린다는 몽골로 가자 이렇게 된거죠. 브로커한테 듣기로 몽골은 당시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데 협조적이니 몽골수비대(몽골군인)에 잡히기 전까지는 북두칠성만 보고 계속 걸어라 했어요. 그렇게 해서 중국 국경을 넘었고 정말 북두칠성만 보고 헤맨 끝에 운 좋게도 12시간만에 몽골수비대에게 잡히게 되었어요.

   
 

하기자: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나요?

울란바토르에 도착해서 수용소 같은데 들어갔는데 그때 처음 알았어요. 탈북자들이 그렇게 많은지. 그리고 그 처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누나뻘인데 얼굴에 동상이 생겨 짓물이 흐르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발목을 잘라야 되는 상황이고 어떤 사람은 손목을 잘라야 되고... 2차 세계대전 영화들 보면 패잔병들 있잖아요. 그런 곳이었어요. 우리 일행은 8명 이었는데 사지 멀쩡하게 들어 간 거죠. 사람들이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훗날 한국에서 몽골 통해 탈북해 온 어떤 친구를 만났는데, 자기는 13명이 출발해서 3명 살아 돌아왔대요. 15일 정도를 사막에서 헤매면서 대부분의 일행이 굶어죽거나 얼어죽었고, 그 친구가 우리 동네에 살아서 가끔 보는데 동상으로 엄지발가락이 잘려 나갔어요. 그렇게 수용소를 거쳐서 무사히 2006년 6월 8일날 대한민국에 도착하게 됐죠.

유기자: 그 당시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다 한국에 건너 온건가요?

그렇죠. 거기 있던 사람들은 다 넘어왔을 거에요. 우리보다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먼저 오고 건강상태가 심각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넘겨주고 저희는 한국으로 오는데 그래도 3개월 걸렸어요. 중국이 아닌 곳에서 붙잡혀서 북송되는 위험은 없어요. 중국 관할만 벗어나면 되는 거에요. 유투브에서 영상을 보면 중국 안에 있는 다른 나라 대사관에 진입하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는 영상들이 있는데 그 이유가 그런 거에요.

하기자: 가족관계를 물어봐도 될까요?

상관없어요. 일단 외동아들이고 북한에 있을 때 다섯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어요. 북한도 합의 이혼이 가능해요. 그 이후로 어머니와 같이 17년을 살았죠. 지금은 외할머니, 막내 이모 가족도 한국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분들도 중국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2차로 데려왔어요.

   
▲ 함께 온 외할머니, 작은이모 가족과 함께 작은 파티도 가졌습니다.

하기자: 혈우병 진단은 어떻게 받았나요?

어머니가 돌 즈음에 진단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어렸을 때 돌상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제 막 걸음마 시작할 때 힘이 없으니까 털썩 주저앉다가 입술안쪽이 아랫니에 찍혀서 작은 진료소에 갔는데 피가 어디서 나는지도 찾지 못하는 거죠. 출혈이 계속 있어서 큰 병원에 갔더니 출혈 부위를 찾아냈고. 처음엔 어떤 출혈인지 알 수 없어 전기로 지지는 걸 했더니 애가 입술부위가 말이 아니었다고 해요. 간호사가 계속 출혈되는 게 이상하다고 큰 병원 가봐라 병명은 잘 모르겠다 해서 함경북도 청진이라는 곳의 도병원(도에서 제일 큰병원)에 갔더니 선천성 혈우병이라고 진단을 받았죠. 혈우병이 뭐냐고 물었더니 피가 멎지 않는 병이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방법이 없다고... 일단 수혈받자해서 엄마 혈액형이 같아서 네 번 수혈을 받았는데 그래도 의식을 못 차렸대요. 의사들 말이, 얘는 살아나도 12살 못넘길 거라고. 왜 그러냐니까 성장하다 뇌출혈 같은 거 있으면 끝난다고 엄마한테 얘기 했대요. 그래서 엄마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제가 “엄마”하면서 깨어났대요.

   
▲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하기자: 북한 의료 환경이 열악한 걸로 알려져있는데 어릴 때 혈우병 진단을 받은걸 행운이라고 해야 하나요?

제가 봤을 때 북한이 핵 개발 하는 걸 보면 기초과학은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다만 해결 방법이 없는 거죠. 희귀질환이다 보니 작은 병원은 진단도 못하는 거 같고 큰 병원들은 혈우병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하기자: 북한에서의 혈우병 치료는?

북한에는 방법이 없어요. 의사가 방법하나 알려 준 것이 지혈에 도움되는 걸 먹으라고 해서 코뿔소 뿔, 북한에선 서우라고 하는데 코뿔소 뿔을 구해서 출혈시마다 갈아먹으면 효과가 있을거라고... 근데 그 귀한 걸 어떻게 구해요. 꿩 대신 닭이라고 물소 뿔을 구해서 신문지를 깔아놓고 쇠톱을 가는 쇠로된 칼로 갈아서 먹은 기억 밖에 없어요. (하기자: 효과가 있던가요?) 아까 말했듯이 1년 중 출혈이 없었던 적이 별로 없었어요. 별로 효과는 없었던 거죠.

   
▲ 사촌동생과 함께

하기자: 그럼 출혈 시 통증을 참고 살았었나요?

그래서 하늘을 참 많이 원망 했었어요. 부모님도 엄청 원망했었고... 왜 이렇게 나를 낳아서 괴롭게 하냐고요. 저녁이 되면 통증이 더하잖아요. 그래도 찬물 찜질이 최고였죠. 그러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한번은 의사가 몰핀(마약성진통제)을 놔줬어요. 통증이 멎었을 때 쾌감이... 정말 신세계였어요. 북한에는 진통제라고 할 다른 약이 없었고 얼음도 구하기 힘들어서 찬물 찜질이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하기자: 북한에서 다른 환우도 알고 지냈어요?

한 번도 본적이 없고요. 큰 이모 아들이 12살에 비슷한 증상으로 죽었다고 했어요. 엄마 여자형제만 6명이에요. 가족 중에 비슷한 증상으로 돌아가셨단 얘기만 들었을 뿐 다른 혈우병 환자는 본적이 없어요.

   
 

하기자: 북한 혈우환우들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뭐니뭐니해도 응고인자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리고 제 경험으로는 잘 먹고 또 나이가 들면서 면역력이 작용을 하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출혈횟수가 줄더라고요. 10대 땐 1년에 두 달 정도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하면 10대 중후반부터는 출혈횟수가 확연히 줄었던 것 같아요. 그 때는 중국에서 잘 먹었거든요. 잘 먹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그 때는 출혈횟수가 많이 줄었어요. 1년에 6개월 아프고 6개월 괜찮았어요. 잇몸에 출혈이 생기면 피 비린내 같은 게 나잖아요? 중국에선 매일 삼키던 냄새라서 의식하지 못했었는데, 한국에 와서 치료받고 거의 정상인처럼 살면서 몇 년만에 입안에서 피맛이 나니까 응고인자 맞고 그동안 아픔을 잠시나마 잊고 살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감사했었죠.

하기자: 한국에서 가장 즐거운 경험은?

경험담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빼놓지 않고 얘기 하는게, 저의 2006년 6월 8일은 내가 눈감아도 잊을 수 없는 날이고 그날은 많은 것을 의미하는 날이기 때문이에요. 그 다음은 신분증 받던 날, 학생증 받던 날 그리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3가지가 제일 소중하고, 뭐니 뭐니 해도 이제는 출혈이 어색할 정도로 아프지 않다는 거,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죠. 즐거운 거야 맘만 먹으면 뭐든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게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 한국에 와서의 다양한 강연, 토론회, 연극활동들

하기자: 나만의 버킷리스트가 있다면?

첫 번째로 남아프리카에 가서 봉사 또는 남아프리카에서 생활 하는 게 있어요. 왜냐면 지난날들을 망각하고 살 때도 있으니까 어려운 나라에 가서 활동해보고 싶어요. 선교 활동과는 별개로 저 개인적인 버킷리스트에요. 그 다음에 저는 바다를 좋아해서 예쁜 바다가 있는 예를 들면 세부, 두바이 이런 데 여행하는 거. 가족과 함께 가고 싶어요. 이것도 크게 욕심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살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한데 그래도 저만의 버킷리스트입니다.

김기자: 대학에서 심리학공부를 하고 있잖아요. 왜 심리학을 선택했나요?

32년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았는데, 기적적으로 삶이 이어졌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신앙을 가졌고 신앙 안에서 진로를 선택했어요. 제가 한국에 살면서 자살충동을 느꼈을 만큼 진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한국 처음 왔을 때 뉴스에서 이슈됐던 게 연예인 자살 얘기였어요. 뭐가 부족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5년 전쯤엔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그 때 자살 충동을 느껴 죽으려고 생각했는데 억울하더라고요. 돌이켜보니까 좋았던 시간이 크게 없는 거에요. 이렇게 죽으려고 목숨 걸고 그 어려운 시간들과 아픈 다리로 두만강을 건넜었나 이건 너무 억울하지 않나 해서 일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이러한 이유 때문에 힘들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 내가 죽는 날까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내 경험을 바탕으로 자살충동을 느끼고 있는 아이들을 돌려세울 수 있다면 그 삶도 살아볼만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애들한테 나는 이런 몸과 이런 환경에서 살았는데 너희들이 못할게 뭐가 있냐 이말 하고 싶어서... 경험은 있는데 말로 풀어내려고 하니까 너무 어려운거에요. 그들의 눈높이를 맞추려면 내가 배워야겠구나! 그 생각으로 심리학을 배우려고 들어왔죠.

   
▲ 한국에 와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을 때의 즐거움

하기자: 한국 환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저는 탈북자로서 북한에서 약도 없이 힘들게 병을 이겨냈어요. 한국에 와서 느끼는 거는 혈우병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나서 초기부터 치료 받을 수 있다라는 게 저하고 비교한다면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저도 연골이 다 망가지고 하고 싶은 축구도 못하지만 그래도 감사하거든요. 통증 없이 사니까. 친하게 지내는 기용이(혈우환우)는 축구를 하더라고요. 저는 그게 부러워요. 사실은 그 친구는 중증환우인데도 불구하고 축구를 해서 허벅지가 딴딴해 바지 사이즈가 안맞다고 우는 소리를 해요.ㅎㅎ 나도 그랬으면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나보다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만 하면 나는 초라해 질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혈우병이 이미 있는 걸 어떻게 하겠어요. 받아들이고 오히려 혈우병을 가지고도 나는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내 자존감 올리고 누군가에겐 다시 동기부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열심히 사는 이유 중에 하나가 혈우환우 동생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또 통일이 되면 북한 환우들한테도 나도 이렇게 살아왔고 너희도 못할 것 없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요.

   
▲ 밝은 표정의 김필주 환우와 하석찬 기자

인터뷰를 마치며 지금 김필주 환우의 얼굴에서 그늘을 찾을 수 없는 이유를 알았다. 역경의 골은 깊으나 '빛'이 더 강해서였다. 자유와 함께 치료를 향해 헤쳐나온 용기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만들어내는 빛 때문이란 말이다. 우리의 치료환경과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노력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도 해서 좋았다. 용기있는 인터뷰와 힘이 담긴 메시지를 전해준 김필주 환우에게 다시 한 번 진심어린 감사를 전한다.


 

   
▲ 헤모필리아라이프 편집부 기자단 총출동

[정리 헤모라이프 김태일 기자 / 사진&영상 유성연 김태일 기자/ 인터뷰 진행 하석찬 기자]

김태일 기자 saltdoll@newsfin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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