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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기사승인 2022.08.29  16: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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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학도 혈우환우 정철환 씨 인터뷰

배움에는 적절한 때가 있을까? 8살에 학교에 들어가 12년간 초중고를 다니고, 성적 좋으면 대학, 좋지 못하면 사회생활, 그 후로는 생활에 치여 책 한 권 들여다보지 않는 삶이 대부분일 것이다. 누구나 더 나은 삶을 꿈꾸고 존중받는 위치에 오르고 싶어하면서도 정작 거기까지 닿기 위한 공부에는 '이미 때가 지났다'는 핑계로 소홀하다. 오늘은 적지 않은 나이에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60세의 혈우환우 정철환 씨를 만나 인터뷰했다. 한 달에 30만원 가량을 책 사 보는 데에 쓰고 있다는 그의 열정이 혈우사회 구석구석에 닿기를 바라본다.

   
▲ 서울 구로연세재활의학과의원에서 우연히 만난 정철환씨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 나눴다. 

Q.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서울 구로구에 사는 올해 60세이고요. 8인자(중증) 정철환이라고 합니다.

Q. 여가 시간은 어떻게 보내시나요?
A. 취미가 당구 치는 건데 요즘 코로나로 당구장도 못 가네요. 운동을 수시로 해줘야 하는데 운동은 할 수 없고 당구 치면서 나름 운동이 되더라고요. 당구장 가면 멤버들도 있고 한게임 하면 운동 겸 할 수 있었는데 그런게 없어지다 보니 아쉬움이 있습니다. (기자 : 당구는 얼마나 치시나요?) 대대로 17 놓고 합니다. 당구 손을 놓은 지 2년 되었지만, 다시 하다 보면 감이 다시 살아나겠죠. 또 다른 취미는 낚시를 좋아합니다. 시흥에 가림낚시터나 금이낚시터를 주로 다녔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입어료가 올라 부담되어서 인천 굴포천이나 부천 대장동에 노지 낚시터에서 자주 낚시를 했었죠. 노지 낚시하다 보면 가끔 대어가 나오기도 합니다. 취미라기보다 책은 일상적으로 읽구요.

   
▲ 취미로 낚시를 즐기는 정철원 씨

Q. 책은 얼마나 읽으세요?
A. 한 달에 한 20권 가까이 읽는 것 같습니다. 생활비 중 책 구입 하는 비용이 제일 많은 것 같아요. 책을 많이 구입 하다보니 집 한쪽 벽면에 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려서 혈우병이 없었다면 다른 길을 갔을 것 같아요.

Q. 어렸을 때 얘기 좀 해주세요.
A. 시골에서는 읍내 나가려면 하루에 한 두 대 다니는 버스 타고 나가야 하잖아요. 그때 당시 인구가 많아서 버스 안에 사람을 짐짝처럼 싣고 다녔어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는 읍내로 가야 하는데 차를 못 타는 거예요. 그렇다고 자전거도 탈 수 없고 그래서 중학교 입학하면서 없는 살림에 방을 얻었어요.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 부모님께서 해주셨어요. 그런데도 학교에 다니지 못했어요. 근육 출혈이 생겨 학교를 갈 수 없어서 자진 휴학을 하게 되었어요. 
원래 어려서부터 꿈이 글을 쓰는 거였는데 생활고 때문에 일을 해야 하잖아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배움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살았었죠. 그러다 저희 아버님이 근위축성측색경화증이라고 루게릭병으로 작고하셨는데 저한테도 병이 왔어요. 서울대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43살에 은퇴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벌어놓은 돈을 여행으로 거의 탕진 했어요. 왜냐면 저희 아버님이 확진 받으신 지 6개월 만에 돌아가셨거든요. 저도 그럴 줄 알고 그동안 못해본 여행이나 다니자 하고 모든 돈을 여행에 다 써버렸죠. 여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됐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충만한 행복감이 몸에 깃들더라고요. 감정부터 정서까지 천국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러더니 루게릭병이 멈춘 거에요. 조금씩은 진행이 되는데 급히 진행 되던 게 멈춘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여행 때문에 내가 살았다. 전국 시도를 돌아다녔어요. 제주도도 두 번 가고 배에다 차를 싣고 다니면서 여행으로 1억 정도 썼더라구요. 지금 생각하면 후회는 안 되는데 너무 낭비 했구나! 생각은 들더라고요.ㅎㅎ 
그러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나는 벌레 같은 인간이 되는구나 생각을 하다 검정고시를 생각했죠. 중학교 검정고시는 쉬웠어요. 기초적이니까 제가 기본 상식이 있고, 살아오면서 축적된 게 있잖아요. 고등학교는 좀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괜찮은 성적으로 합격을 하고 나니 더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찾아보니 서울 사이버 대학이 있어서 원서를 넣고 다니게 된 거죠. 올해 졸업반인데 코로나로 오프라인 가을 졸업식이 안 열리는 거에요. 한번도 제대로 된 졸업식을 못해봐서 겨울 졸업식에 맞춰 한 학기 연기해서 두 과목 신청해 놨어요. 혹시 내년 2월에도 오프라인 졸업식이 없으면 그냥 졸업 하려고요.

   
▲ 곡절 많은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으며 숙연해기지도 했다.

Q. 아까 43세에 은퇴하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A. 학원에서 운전직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옆에 사립 유치원이 있어 오며 가며 유치원 이사장님이랑 인사하고 지내다 저를 잘 보셨는지 어느 날 이사장님이 사무실 한번 와보라 해서 갔더니 저한테 그런 제의를 하시더라고요. 우리 유치원에서 사무장으로 일할 생각 없느냐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사무장으로 일을 하게 됐죠. 지금 생각해 보면 제 삶에 봄날이라고 표현을 하거든요. 10여 년 이상했죠. 그때 거기서 43세에 은퇴를 한 거예요. 루게릭병을 알게 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일을 그만두게 됐죠. 이후로 여행하면서 겪은 얘기랑 살면서 든 생각을 엮어 자비로 출판을 한 책도 있습니다. 저의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는 출판사하고 계약으로 책을 출판하는 게 꿈이기도 합니다.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글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Q. 혈우병 진단은 언제 어떻게 받으셨나요?
A. 그 당시 병 자체도 모르는 상황이고 일반 병원에서는 혈우병을 안 보는 시기였어요. 저도 잘 몰랐고 부모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는 제가 걷기 시작했을 때 걷다가 넘어져 하필이면 입안이 찢어졌나 봐요. 보통 사람들은 지혈이 되죠. 근데 저는 피가 계속 나는 거에요. 이상하다 싶어 읍내 병원에 갔는데 모르는 거죠. 그리고선 광주 전남대병원에 갔나 봐요. 2살인가 3살 때 진단을 받았고 약이 없어서 힘들게 살았죠. 20대에 서울에 상경했는데 그때도 몰랐어요. 그러다 우연히 신문을 보고 혈우재단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때부터 재단의원을 다니기 시작했죠. 가족력이 있는 병이다 보니 여동생의 아들도 혈우병을 가지고 있어요. 조카는 어려서부터 약을 맞고 하다 보니 축구를 할 정도로 건강해요. 축구를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건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Q. 현재 치료제는 어떤 걸 사용하시나요?
A. 구로 연세재활의학과에서 화이자 진타 사용하고 있고요. 만족하고 있습니다. 진타로 바꾼지는 4~5년 된 것 같아요. 잘은 모르는데 약이 여러 군데서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평소에는 예방으로 일주일 2~3번 맞고요. 출혈 시에 하루 2번 맞을 때도 있어요.

   
▲ 정철환씨가 펴낸 책 '당신의 꿈을 기억합니다'

Q. 간호사 프로그램도 이용하는걸로 아는데 어떠신가요?
A. 만족하는 편이고요. 전화통화하면서 정신적이나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고 가끔 병원 방문할 때 차 한 잔 하면서 대화도 하고 약간의 정보도 얻고 유용한 것 같아요.

Q. 현재 제일 불편한 곳은 어디인가요?
A. 제일 불편한 곳은 양쪽 발목관절이 제일 그래요. 무릎은 경직되어 더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고 걷는 데 불편하고 조금만 걸어도 출혈이 되고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요.

Q. 살아 오시면서 가장 속 깊은 얘기를 나눈 사람은 누구였나요?
A. 그 부분이 좀 아쉽기는 하네요.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누나가 있고 누나가 일찍 사회에 나가다 보니 크게 도움이 됐고 친구들이 있긴 한데 사이버 대학교와 일반 대학을 좀 구분을 짓는 것 같더라고요. 근데 제 입장에서 사이버 대학 강의 내용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거든요. 너무 좋고 도움이 되어서요. 대학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했는데 그 친구는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멀어지더라고요. 그런 부분에서 좀 안타까웠습니다.

   
▲ 집 서재 앞에서

Q. 서울에 올라오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시나요?
A. 안병욱 교수의 철학서를 읽고 고민을 많이 했죠. 내 삶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시골에서 이렇게 살면 거의 밑바닥에서 인간의 삶이 아닐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기 위해 풀을 뜯어 책갈피에 넣어 말리고 봄부터 가을까지 5천 장을 만들어서 박스에 담아 서울로 올라왔어요. 팔면 히트를 칠 것이다 생각하고요. 크리스마스 2일 앞두고 가리봉동에 20에 4만 원짜리 월세를 얻어 그걸 가판대에 끌고 나갔는데 사람들이 쳐다도 보지 않아 한 장도 팔지 못했어요. 실망을 엄청했죠. 이후 서울에서 생활을 해야 하잖아요. 여동생 둘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에 먼저 와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여동생들에게 생활비 도움을 조금 받고 몇 개월 서울에서 취업하려고 했는데 취업이 되나요. 며칠 일을 나가면 출혈 돼서 못 나가고 그때 당시는 며칠 못 나가면 해고되고 그런 현실이었죠. 교회를 다녔는데 교회 장로님의 지분이 있는 택시 회사에 야간에 할 수 있는 일을 소개해줬는데 거기서 봄, 여름, 가을은 견딜 수가 있더라고요. 택시가 들어오면 미터기 찍고 기사를 배차해 주는 업무인데 겨울은 추워서 몸에 무리가 오고 해서 못하겠더라고요. 추위를 견딜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두고 거기서 운전면허를 따 여차저차 하다 보니 아까 말한 학원 기사로 일을 하게 됐죠.

Q. 타임머신이 있어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다면?
A.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건강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서 정말 내가 펼치고자 하는 삶을 살아보고 남들과 경쟁을 한번 해보고 싶죠. 그런 말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가장 실수한 게 사람을 두 번 태어나지 못 하게 한 거라고. 다시 한 번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다라고… 두 번째는 저희 아버지하고 한 시간이라도 술 한 잔 하거나, 바닷가에 같이 놀러 가고 싶은 거 그런 것들을 못 해봐서 아버지와의 추억이라고 할까, 완고하셨는데 자식은 아버지를 닮고 아버지를 존경하잖아요. 보통 사람들은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아인슈타인이나 세종대왕, 이순신 이러잖아요. 저는 제일 먼저 아버지라고 하거든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크고 아버지와 시간을 가져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타임머신이 존재하지 못하니까 아쉬운 거죠.

Q. 손목에 노란색 팔찌는 뭔가요?
A.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자 그런 의미로 '리멤버 0416' 팔찌에요. 참사 가족들이 안타까우니까. 보통 기부도 가난한 사람들이 하잖아요. 저는 서울에 올라오면서 수입 있으면 한 달에 2만 원은 초록우산이나 난민 두 군데 기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제가 힘든 걸 경험하고 살았으니까 그래서 기부하고 살고 있어요. 다른 건 못하더라도 친구들한테 자린고비란 소릴 들어도 기부는 꼭 하고 있습니다.

   
▲ 그의 손목에는 세월호 참사 추모팔찌가 항상 끼워져 있다. 

Q. 나만의 버킷리스트가 있다면?
A. 대학교 졸업하는 거 하나랑 마당이 있는 집에 진돗개를 키우면서 살아보는 거, 책 출판하고, 낚시를 좋아해서 붕어를 40센티 이상 잡아보는 거... 그정도에요. 기부를 받아서 장학재단을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가능성이 적어 포기한 상태이고 그런 정도 있습니다. 지금은 책 출판 잘 하고 싶고 그 외는 잘 살다 생을 마감하는 거죠.

Q. 행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제가 배운 행복은 '빈도수'거든요. 큰 집을 사서 한 번에 행복감을 맛보는 것보다 아이스크림을 매번 먹으면서 느끼는 만족감이 더 크다고 하잖아요. 행복이란 현재를 즐겁게 사는 것 '메멘토모리', '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겨라. 현재를 즐기는 게 행복 아닐까 생각합니다.

[헤모라이프 김태일 하석찬 기자]

하석찬 기자 newlove8@hanmail.net

<저작권자 © 헤모필리아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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