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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혈우병을 갖고 있는 형에게 의지가 됩니다"

기사승인 2022.06.20  12: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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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박유진 씨의 삶과 수술 이야기

혈우병은 대개의 경우 유전에 의해 발현된다. 때문에 형제간에 같이 혈우병을 가진 경우도 적지 않게 발생하나, 치료가 어려웠던 이전 시기를 거쳐 오며 장년층 중에는 형제 혈우환우가 많지 않은 편이다. 우애 좋기로 소문난 한 '유성 유진' 형제환우 중 동생 박유진씨를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자유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유진씨와 10분간 함께하자!

   
▲ 무릎 수술 후 재활중인 혈우환우 박유진 씨를 만나 혈우병과 함께해 온 삶에 대해 이야기 들었다.

문 : 본인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답 : 안녕하세요. 저는 박유진(중증)이고요, 산본에 살고 있고요. 나이는 쉰셋, 현재 다리 수술 때문에 코집에서 머물면서 물리치료 받고 있습니다.

문 :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혈우병을 어떻게 처음 알게 되셨나요?
답 : 정확히 몇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어릴 적에 알게 됐죠. 어릴 때 두 형제가 다 아프고 출혈 때문에 붓고 하니까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혈우병 협회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습니다.

문 : 늦게 약을 맞기 시작하셨어요?
답 : 그렇죠. 약이 나오기까지 어머님이 청와대에 투서를 많이 넣었어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많이 넣었는데 우리꺼 외에도 수 만 통이 온대요. 청와대에서 이걸 볼 확률도 적고 한데 다행히도 보좌관 같은 분이 맨 처음에 보고 영부인한테 전달이 되었나봐요. 어머님이 일본에는 혈우병 치료제가 있다는 뉴스와 신문을 보시고선 청와대에 투서를 넣은 거죠. 우리나라도 치료제 수입할 수 있지 않느냐 해서 어머님이 구구절절한 내용으로 16절지로 한 4~5장을 써서 보냈다고 하시더라고요. 청와대에서 우리 사정을 알고 그 당시 의사를 미국으로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뭔가 알아서 와라”라고, 그래서 처음 약이 들어온게 크라이오(초창기 혈장 분획제제) 일꺼에요.

문 : 크라이오 약은 어땠나요?
답 : 사람의 혈액으로 만든 약이라 맞으면 어떤 사람들은 알레르기가 생기고 했어요. 그 약을 일본, 미국에서는 안 쓸 때였대요. 더 발달된 약이 나올 때고 이후에 그런 약을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에 중고 기계까지 들여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약을 들여와서 그걸 맞다가 의료보험에 문제가 생겼죠. 약이 비쌌잖아요. 당시 아버지 월급이 8만 원인가? 공무원 월급이 그쯤 할 때 였어요. 약값이 너무 비싸 어머님들이 투서를 세 번 정도 더 넣어 의료보험이 적용이 되었고, 그 이후 세브란스 병원에 혈우병 클리닉이 생기게 된거죠. 그러면서 청년 고리회도 만들어졌죠. 당시 어머님들이 혈우병약 의료보험이 되도록 많이들 고생하셨죠. 특히 민 여사님하고 몇몇 어머님들은 “이제는 너희가 나보다 더 많이 배웠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니까 내가 할 도리는 여기까지 했다. 너희가 앞으로 나서라.” 하고 그 당시에 청년 고리회에 또 형들한테는 “너희도 발 벗고 나서서 이렇게 해야 한다. 싸울 때 싸우고 청와대도 계속 보낼 건 보내고 이렇게 해야지만 너희가 인생을 편하게 살 것이다.”라면서 활동을 독려하셨대요.

   
▲ "취미로 섹소폰 동호회 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문 : 초창기 어머님 활동이 굉장히 활발하셨고 그 뒤에 다른 분들께 맡겨주셨군요.
답 : 그렇게 하면서 점점 환우들이 모이면서 재단이 생겼고 재단이 생기면서 다시 모임을 하고 이렇게 온 거에요. 솔직히 저는 혈우병이지만 혈우병이란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어요. 또 주위에 친구들이 거의 토박이니까 초등학교 어릴 때부터 자란 친구들이 같은 중학교 나오고 이러다 보니 힘센 애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힘센 친구들이 있으니까 뭐 맞을 이유도 없고 또 위에 형이 있으면 애들이 형이 있으면 못 건드려요. 학교는 편하게 잘 다녔죠. 그리고 나는 아프다고 해서 방에만 있는 성격이 아니라 모험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별거 다 해봤어요. 자전거도 배워서 다녀보고 넘어지기도 하고 하면서 배우고 호기심도 많았고 그래서 이것저것 그냥 재밌다 싶으면 일단 해봤어요.

문 : 약이 나오기 전 시기에는 굉장히 고생하셨나요?
답 : 많이 했죠. 한 번 출혈이 생기면 딱 일주일에서 열흘 가요. 일주일 동안은 고통 속에 사는 거죠. 통증으로 살다가 퉁퉁 다리가 붓죠. 퉁퉁 붓고 의사도 뭔지 모르니까 가면 막 주무르잖아. 그럼 더 붓는 거죠. 의사들도 혈우병을 잘 몰랐으니까요. 그런 고생도 많았고 일주일이 지나면 슬슬 붓기와 아픈 게 가라앉죠. 우리 병이 그렇잖아요. 그러면서 점점 관절은 망가지는 거죠. 그래서 지금 젊은 사람들 보면 참 부럽고 어머님한테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문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거 다 하면서 즐겁게 했다고 하는 건 자전거도 배우고 또 어떤 활동 많이 하셨어요?
답 : 오토바이도 타다 다쳐 새벽에 적십자 응급실에 실려 가보고, 열 살 때 놀다가 한 2층 정도 되는 높이에서 떨어져서 머리부터 떨어졌는데 앞에 중국집 할머니가 떨어진 걸 보고 따뜻한 물로 머리를 적시고 해서 정신이 깨고 그런 시절도 있었고 하여튼 죽을 고비는 아주 많이 넘겼어요. 자전걸 타다가도 시골이니까 내리막길이 있고 도랑이 있고 브레이크가 안 돼서 도랑에서 빠졌던 것도 어떻게 건졌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내가 명이 길구나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어요.

문 : 코헴회 활동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계기가 있었나요?
답 : 내 기억으로는 내가 고등학교 때쯤 알게 된 것 같아요. 20대 초반에 형들하고 그냥 모임이 있으니까 저는 의무적으로 참석한 거죠. 엄마도 가라고 했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임 있을 때 가서 얘기 듣고 서로 대화도 나누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문 : 수술받으셨다고 했는데 어떤 수술을 받으셨는지, 또 결과는 어땠어요?
답 : 관절은 다 망가졌는데 아파본 적은 없어요. 대부분 인공관절 하시는 분들이 아파서 잠 못 자고 인공관절 하는데 저는 아프지 않으니까 일하는 데도 지장이 없고 그래서 수술을 안 했어요. 우리 형 수술을 하고 잘 걷는 거 보고 나도 수술을 해야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주로 차를 갖고 다녀서 그렇게 불편한 게 없었기 때문에 또 직업도 그런 쪽에 있다 보니 수술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생각을 안 했어요. 그래도 내 관절로 걷는 게 낫겠다. 이런 생각을 많이 가졌었는데 어느 때 부턴가 걷는게 10분 이상은 못 걷겠더라구요. 형이 먼저 수술하고 난 다음에 '해라, 나이 먹기 전에 해라, 하면 너도 걸어 다닐 수 있다, 얼마든지' 그래서 수술하게 됐죠.

   
▲ 음악 봉사활동으로 야외공원에서 연주 중~

문 : 어떠세요? 좀 많이 좋아졌나요?
답 : 2월에 오른쪽 무릎 수술하고 두 달 조금 안 됐죠. 되게 많이 좋아졌어요. 걷는 것도 많이 좋아지고 지금은 다리 힘 기르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고관절은 건강해서 재활에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문 : 수I 후에 출혈은 없으셨어요?
답 : 네, 없었어요. 출혈은 없고 잘 아문 것도 남들보다 빨랐다고 하더라고요, 강동경희대병원에서는 거의 일주일이면 내보내는데 내가 좀 느렸나 봐요. 거기서 열흘 좀 더 있자 해서 열흘 만에 퇴원했어요.

문 : 요새 나를 가장 웃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답 : 나를 웃게 만드는 거 글쎄, 뭐라 그럴까? 다리 수술하고 희망이 생겼다랄까? 희망도 더 알찬 희망, 이제는 내가 더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꿈도 있고 수술하고서 자신감도 생기고 그러니까 즐겁죠. 아무래도 수술이 잘못되면 어떡할까? 우울한 생각도 했었는데 첫 수술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인공관절 수술하신 분들도 제대로 재활을 안 받아서 구부러진 사람도 있고 뻗정다리인 분도 있고 그런 분들은 여러 번 뵀거든요. 그런데 일단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것 같아요. 수술하고 난 뒤부터는 아픔은 참고 재활을 진짜 열심히 해야 된다는 걸 깨달고 치료받고 있습니다. 매일 보는 물리치료사 권 선생님도 조언을 많이 해주시고 너무 감사하죠.

문 : 수술하고 제일 많이 달라진 부분은 어떤 거예요?
답 : 수술하기 전에 85도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수술하고 난 다음에는 90도. 재활치료 받으면서 선생님들이 하는 말씀은 100도까지는 충분히 나오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처음 수술해본 거니까 소문만 듣고 120도도 나오겠다 싶어 물리치료사 선생님께 “120도 안 나오면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이랬거든요. 친하니까. 맨 처음 목표는 120도 였는데 그게 욕심이고 무리구나. 어느 정도 이것도 제한이 있구나. 그래서 지금 100도 정도를 생각하고 만족하고 있습니다.

문 : 로또에 당첨되면 하고 싶은 것은?
답 : 로또가 옛날처럼 100억씩 주고 하지는 않잖아요. 로또에 당첨된다고 해서 크게 뭐 30억 안 되는 걸로 내가 알고 있는데... 일단은 즐겁게 살아야죠. 무덤에 가져갈 것도 아니고 해서 일단은 우리 코헴 자체에 사회복지사제도 같은 걸 하나 만들고 싶어요. 만들어서 어린아이들, 청소년 심리상담도 있고 나이들면 치매도 생기고 힘들게 사는 혈우환우도 많잔아요. 그런 혈우환우들을 도울 수 있는 그런 것들을 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능력이 되면요.

문 : 제일 좋아하는 스마트폰 앱은 무엇인가요?
답 : 앱은 아무래도 유튜브죠. 저는 한 5년 됐어요. 섹소폰을 취미를 가진 지 5년 됐고 무료 봉사 모임도 있어요. 인원이 한 7명 되거든요. 그 모임에서 봉사활동도 많이 하고 주로 음악 봉사 활동쪽을 많이 찾아가죠.

문 : 형제가 다 혈우병 가지고 계신 데 자라오시면서 많이 좀 의지가 됐나요?
답 : 아무래도 되죠. 그럼요. 어릴 때는 형제간에 싸움도 했고 하지만 그래도 의지는 되죠.

   
▲ 취미로 연주하는 나의 기타와 섹스폰 악기 입니다.

문 : 자주 교류하세요?
답 : 이제는 나이를 먹으니까 형을 찾게 되더라고요. 찾기도 하지만, 형하고 같이 밥도 먹고 기회를 형이 만들든 내가 만들든 형제간의 일을 만들어야 하겠다 해서 형하고 잘 재밌게 지내고 있습니다. 옛날엔 많이 싸웠어요. 왜냐하면 형하고 나하고 성격이 전혀 다르거든요. 다른데 지금 형은 나이를 먹으니까 존중도 하게 되고 형이 술 먹고 싫은 소리 해도 넘어가게 되더라고요. 며칠 전에도 지갑에 돈도 떨어지고 화장품도 떨어지고 이러니까 “내가 화장품 사서 갈게” 이러더라고요. “남자는 혼자 있어도 지갑에 돈은 있어야지” 그래서 “돈은 마음으로 받을게, 괜찮아” 그랬더니 “그래도 그게 아니야” 그러더라고요. 농담으로 얘기했는데 형이 챙겨 주니 고맙드라고요. 또 형한테 재활치료 제대로 안 받았다고 엄청나게 야단도 맞았죠. 운동 제대로 하라고요. 이렇게 지내고 있어요.^^

문 : 마지막 질문,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답 : 우리 같은 경우는 안 아픈 거죠. 일단 안 아프고 사는 자체가 행복이고 그런데 지금 또 약도 나오고 내가 재활만 잘하고 약 제대로 잘 맞으면 안 아프고 사니까 그건 또 행복의 희망이 생긴 거고 나 나름의 행복? 지금도 하고 싶은 거 막 하고 싶어요.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하죠. 내가 하고 싶은 건 힘들더라도 자신 있게 하면 일단은 안 되더라도 도전하는 거. 저는 행복한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두렵지 않아요. 하고 싶다는 건 한 번 해보고 안 되면 할 수 없는 거고 이게 내 몸이 안 받는구나. 다른 경험을 쌓잖아요. 그래서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헤모라이프 김태일 하석찬 기자]
 

하석찬 기자 newlove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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