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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출혈로 입원을 반복했지만..."

기사승인 2021.11.19  18: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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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출혈 없이 건강을 지킨다는 에바타 타카토시 씨

   
▲ 일본 홋카이도에서 치과의사로 활약중인 에바타 타카토시 씨

♣ 놀이도 운동도.....생활하는데 별다른 제약이 없어서 병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제가 한 살 때 부모님께서 멍(내출혈)을 발견하시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그때 혈우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무슨 일이 생기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홋카이도 환우회인 「도우회(홋카이도 헤모필리아 친구들의 모임)」에 참석하셔서  혈우병에 대해 배우거나 다른 부모들과 정보를 교환하시면서 교류가 깊어진 것 같습니다. 또한 부모님은 초중등학교 담임 선생님께 제가 혈우병이라는 사실을 전달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혈우병 진단을 받은 후에도 부모님으로부터 '이건 안 돼', '저것도 안 돼'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없고, 생활하면서 무언가 제한을 받은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과 노는 것이나, 체육 수업이나 운동회에 참가하는 것, 소풍이나 수학여행 가는 것 등, 뭐든지 친구들과 똑같이, 제가 좋아하는 대로 다 하며 살아왔습니다.

부모님께 혈우병이라는 것에 대해 듣긴 했지만, 어떤 제한을 받았던 기억은 전혀 없고, 제가 혈우병이라는 사실에 신경을 쓴 적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친구들에게조차 말하지 않았고 주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릴 때 친구들과 같이 놀거나 장난을 치다가 무심코 몸을 부딪쳐서 넘어지거나 하면 피하 출혈이나 외상 출혈은 물론, 근육 내나 관절 내에도 출혈이 발생해서 손발이나 관절이 부어올라 꼼짝도 할 수 없게 되고 그런 이유로 종종 입원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때였는데 친구들과 체육관 창고에 몰래 들어가 놀다가 뜀틀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딪친 적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신장을 다쳤는지 집에 돌아와서 소변을 보는데 시뻘건 오줌(혈뇨)이 나왔고, 놀란 부모님께서는 황급히 저를 병원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때 꽤 오랫동안 입원한 적도 있었습니다.

♣ 중학교 3학년 때 뇌출혈을 세 번이나 반복,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정기 보충요법을 시작하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봄, 어디에 부딪힌 것도 아닌데 아침에 일어나면서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병원으로 긴급 이송된 적이 있습니다. 두개내출혈(거미막하출혈)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겨우 호전돼서 퇴원은 했지만, 그 해 겨울 재발하면서 다시 입원하게 되었고 그러다 졸업 직전에 세 번째 출혈이 발생하면서 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고등학교 입학식은 입원 중 병원에서 참례만 했고, 출석 수업은 약 한 달 늦게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집에서 주 2회, 처음에는 부모님이 놔주셔서 정기 보충요법을 시작했고, 얼마 후 자가 주사 방법을 배워서 그 이후에는 스스로 주사를 놓게 되었답니다.

♣ 성장하면서 격렬하게 움직이는 일도 없어졌고,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스스로 깨우치게 되었다.

   
 

성장을 함과 동시에, 대부분 격렬하게 움직이는 일이 적어지게 되죠. 저 역시 성장함에 따라 무리한 활동은 하지 않게 되고, 제 스스로 '이 정도면 괜찮아', '더이상 하면 위험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면서 알아서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학 1학년 때 친구들과 캠프에 가서 함께 뛰어놀다 왼쪽 발목에서 뚝 소리가 나면서 심한 통증이 오면서 그대로 왼쪽 발은 걸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오른발로 낑낑거리며 놀러 다녔죠. 다음날 부어오른 왼발을 감싸고 직접 차를 몰고 집에 돌아와 병원에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상태가 악화되는 바람에 목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입원을 하면 엄청 우울해지면서 그 당시에는 잘못을 반성하기도 하고 조심해야겠다고 다짐도 하는데, 퇴원할 무렵이 되면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성격이라 대학 때까지는 이런 식으로 출혈이 발생하거나 부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고 그 때문에 입원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기 보충요법을 시작한 후로는 출혈로 입원하는 경우가 현격히 줄어들었고, 사회인이 되고 나서 1년쯤 됐을 무렵 혈뇨로 한 번 입원한 것 외에 혈우병으로 입원한 적은 없습니다.

현재는 주 2회 정기 보충요법을 실시하고 있는데 만약 친구들과 놀러 갈 일이 생기면 예비 보충요법으로 미리미리 예방을 잘 해서인지, 무심결에 장난을 치다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증상이 예전만큼 심해지지는 않습니다.

♣ 혈우인이 보충요법을 하는 것은 근시인 사람이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하는 것과 같다.

지주막하 출혈을 일으킨 후 일시적으로 언어 장애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완전히 회복되고 마비도 전혀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왼쪽 발목은 관절 내 출혈이 습관처럼 일어나고, 관절의 가동 범위도 좁아지고 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주치의가 '연골이 녹아 없어지고 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다행스럽게 걷거나 달리는데 큰 문제가 없어서 혈우병 뿐만 아니라, 질병에 대해서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매사를 너무 깊이 고민하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혈우병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질병이라 어쩌면 삶의 일부나 마찬가지이고 현실적으로 혈우병은 제가 아무리 깊이 생각하고 고민해 봤자,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5~6년 정도 전,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참석했던 홋카이도 환우회의 주치의 선생님께서 환우회에서 특별 강연을 하신다고 해서 오랜만에 참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강연에서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혈우병은 8인자가 부족한 것이기 때문에 부족한 것은 보충하면 그만이고, 그것은 마치 근시인 사람이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마다 성격은 다르겠지만, 비단 저와 같은 성격이 아니더라도 혈우병을 가진 것에 대해 너무 비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보충요법으로 부족한 부분은 채우면 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스스로 한 걸음 내디디려고 노력하면 반드시 멋진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환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지금까지 되돌아보면, 한 걸음 내디디려고 할 때마다 반드시 멋진 만남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두개내출혈로 사립 고등학교 밖에 시험을 치를 수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한 달이나 늦게 통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학교라 그런지 뒤늦게 입학한 저를 주변에서 선뜻 받아주었고 즐거운 고등학교 생활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고등학교였기에 대학 추천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서는 주위에 우수한 친구가 많아서 열심인 친구들의 면학 분위기에 이끌려 공부를 했고 유급이나 국시 재수 없이, 치과의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홋카이도 대학의 치주・치료학 교실에 입문해서 4년간 치주질환에 대해 공부한 후, 아는 선생님께 소개받은 치과 의원에서 아내를 만났습니다.

   
 

사실 제가 솔로일 때는 자가주사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내가 워낙 꼼꼼해서 결혼 후에는 잊어버리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최근, 과체중으로 주치의 선생님께 다리 관절에 부담이 되니 체중을 감량하라는 주의를 들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아내와 함께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치과 의원에서 2009년 8월부터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정해진 근무처도 없이 아르바이트로 치과의사를 하고 있었을 무렵, 저보다 먼저 치과의사로 재직하고 있던 사촌으로부터 스터디 참석을 권유받았고, 그 스터디에 참석하면서 지금 병원의 이사장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치과 의원은 설비 환경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고, 최신 기술·최신 기기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구강 내에 관한 치료에 관해서는 최고라 자부하고 있죠,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잇몸질환의 치료든 치아 맞물림의 치료든 전신 건강을 개선하는 것에 포커스를 맞춰서 실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곳에 근무하고 난 후 4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의 강점은 혈우병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기에 환자의 아픔이나 고민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자의 마음에 스며들 수 있었고 앞으로 치과의사로서 더욱 훌륭한 기술을 연마해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무엇인가에 도전하기 위해 한 걸음 내딛게 된다면 반드시 좋은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헤모라이프 조은주 기자]

조은주 기자 cap3882@hanmail.net

<저작권자 © 헤모필리아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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