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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우병 치료제 어떻게 보관하고 있나?

기사승인 2017.02.01  23: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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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장고를 탈출한 RT의 자유” 부럽~

   
 

“아들! 잠깐 와 바라~”
언제부터인가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감소세 양상을 나타내 보이던 울 엄마님이, 냉장고 문을 열어보고는 모처럼 톤레벨을 높이며 나를 부른다. 찬라의 순간으로 그 목소리를 분석해보니 약간의 짜증과, 약간의 미안함이 공존해 있는 듯한 뉘앙스였다.

“왜?”
오버워치 게임에 푹 빠져있던, 나는 방문을 열고 울 엄마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쪽으로 일단 도착지 좌표를 설정했다. 울 엄마님은 한쪽 손으로 냉장고 문을 잡고 계셨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직사각형의 갈색 플라스틱 박스를 들고 계셨다.

“이것 좀 어떻게 좀 정리 좀 해봐!”
부스스한 내 얼굴을 보자, 울 엄마님은 ‘좀’이라는 부사어를 세 번이나 섞어 가며 큰 눈을 더 크게 부라리셨다. 울 엄마님께서 눈을 부라리실 때는 크게 화 난 것은 아니다. 정말 크게 화내실 때는 눈을 부라리지 않고 코 양 옆을 실룩이시면서 입을 한쪽으로 치켜세우신다. 일단 안심이다. 내가 크게 잘못한 상황은 아닌 듯 해 보였다.

“아~ 네~”
울 엄마님 옆구리에 찰싹 안겨 붙으며 엄마님의 눈 높이와 시선 타깃방향을 맞췄다. 목표는 내 약들이었다. 혈우병 치료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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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혈우병을 갖고 있다.
근데 이 병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20여년의 삶속에서 이젠 어느덧 이 녀석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출혈이 일어나면, 난 그저 어린 아기가 ‘엄마에게 젖 달라’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팔을 걷어붙이고 주사를 맞는다. 다년간의 정맥주사 스킬은 가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신감이 붙어 있다. 한눈감고 주사 놓는 건, 이미 혈우재단 설립 10주년 때쯤 마스터했다. 두 눈 감고 주사 놓는 건... 아 이건 내 소심한 천성 때문에 도전해 볼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한번 찌른 주사 바늘이 정맥을 뚫고 나간다 해도, 다시 바늘을 빼지 않고 그 안에서 다시 정맥을 찾아서 바늘을 밀어 넣는 건 리모콘 누르는 것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다. 따라서 원샷원킬!

아무리 좋은 스킬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나 같은 혈우병환자들은 한 달에 두 세번씩 병원을 방문해야 한다. 혈우병 약을 처방받아 오기 위해서다. 치료제를 처방받아 오면 냉장고에 보관해 놨다가 필요할 때 꺼내서 주사한다. 주사를 자주 맞거나 안 맞거나 관계없이 병원에는 꼬박꼬박 가서 약을 타 온다. 이런 패트롤은 오래된 습관에서 나온거다. 아주 예전에는 약이 필요할 때만 병원에 갔었다. 그런데 급성출혈이 발생해서 약을 엄청 많이 사용한 적이 있는데, 한 달에 탈수 있는 약이 제한되어 있어서 더 약을 맞으려면 입원을 해야 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 경혐 이후로는 무조건 탈수 있는 만큼 약을 타 놓게 됐다. 그러다가 주변에 있는 다른 환우들이 급히 약이 필요하면 공수해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좋다. 어쨌든 간에 약을 받아오면 냉장고에 보관하게 된다. 약품 저장방법을 보면 2~8도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냉장고에 흑형(검은색의 비닐봉투에 담긴 약 봉투)을 그대로 넣어 버리는 몹쓸 버릇이 생긴 뒤부터 울 엄마님의 눈 부라림은 횟수가 늘어났다. 가끔 날 잡아서 흑형을 꺼내 놓고는 ‘테트리스’하는 것처럼 정리해 넣기도 했지만 나이가 벌써 서른에 육박해 가면서 귀차니즘 이라는 녀석이 자주 찾아온다. 그러다보니 우리집 냉장고는 어느새 흑형 보관소가 되어갔다. 여기에 울 엄마님이 눈을 부라리신 거다.

   
 

“김치를 넣을 것인가 흑형을 넣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이 잔인한 운명의 돌팔매같은 울 엄마님의 부라리는 눈총을 묵묵히 참고 견딜 것인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 밀려오는 흑형들의 부피에 맞서 결연히 냉장고와 싸우다 쓰러질 것인가!

몇몇 아는 친구들은 냉장고를 하나 더 장만해서 약품 넣는 전용고를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곤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우연치 않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Room Temperature’라는 것, 즉 ‘실온보관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나에게 울 엄마님의 매서운 눈 부라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거였다. RT제품은 30도이내의 실온 보관이 가능하다는데 이것은 완전 냉장고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는 뜻이나 다름없다. 어쩐지 언제부터 혈우병 치료제에 ‘RT’라는 게 붙어있더라니...

아! 그러나! 이 몹쓸 시련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아쉽게도 한계에 직면했다. RT제품은 8인자에서 찾아 볼수 없었고, 진정한 RT는 9인자 ‘베네픽스’와 항체치료제 ‘노보세븐’밖에 없단다. 냉장고를 벗어나 방 책장의 한 구석에서도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치료제, 가정의 평화를 가져올 치료제, 김치를 넣을 것인지 흑형을 넣을 것인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될 RT 치료제. 정녕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인가!

앗!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울 엄마님이 코 양 옆을 실룩거리기 전에, 입을 한쪽으로 치켜 올려 세우기 전에 난 냉장고나 정리하러 가야겠다.

 

※ 돌아온 짱구 소개
저는 혈우병(혈우병A, 중증)을 가진 청년입니다. 설 잘보내셨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제 글은 실제 치료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며 의료적인 부분은 혈우병 전문의사에게 조언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별 특성 및 치료방법, 생각 등이 다를 수 있기에 의료 자문은 자신의 치료병원에서 전문의와 상의하세요. 감사합니다. (사족 : 그리고 금년부터 돌아온짱구가 다시 연재 기고를 해보려고 대표님과 조율하고 있는데요. 원고료는 생각도 안하시는 거 같아서 고민이네요 ㅎㅎ)

돌아온짱구 hemo@hemophilia.co.kr

<저작권자 © 헤모필리아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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